詩 (2018년)

고대극회사 1972 말 - 73 상반기

犬毛 - 개털 2018. 7. 27. 15:04
6. 유신원년 고대극회 임원들의 수난과 <민나 막달레나>, <마지막테이프>, <대머리여가수> (1972년 말 ~ 73년 상반기)

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 선언과 함께 휴교령을 내린 것은 그동안 반정부시위에 앞장섰던 대학생들이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른바 ‘유신방학’ 기간(72.10. 17~11.30) 동안 고대 총학생회 간부들이나 각 써클 임원, 심지어 1학년 교양학부 임원들까지 줄줄이 공안요원들에 의해 남산 서울시경 대공분실(훗날 고문으로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의 전신)에 끌려들어갔다가 풀려난다. 이는 개학을 했을 때 유신반대시위를 조직하지 못하도록 미리 억눌러놓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안희옥(국문72)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고대극회 회장이었던 김원(금속71)도 끌려갔었고, 부회장이었던 안희옥 자신의 집에도 두어 명의 공안요원들이 그녀를 연행해가기 위해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한다. 그때 그녀는 부친이 필사적으로 연행을 저지하는 바람에 다행히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은 그저 글 잘 쓰는 문학소녀에 불과했던 한 1학년 여대생이 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을 싹틔우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런 ‘유신방학’이 끝나고 개강직후인 12월 2일, 고대 교문 앞에 내걸려있던 ‘한국적 민주주의 이 땅에 뿌리박자’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불태워졌다. 훗날 그 일은 71년 10월 위수령 때 해산조치를 당한 고려대 써클 <한맥>의 회원 정진영(사학69), 박영환(철학71), 윤경노(사학71)가 한 일로 밝혀진다.
▲ 72년 10월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학교 정문 앞

한편 이해 가을학기부터 전임 극회회장 장두이(국문70)는 서울시내 연극을 하는 대학생들의 연합모임을 결성해보자는 구상을 하고, 그해 <세대극회(이후 극단 세대)를 창단한 서라벌예대 영연과 학생 임준빈(영연71)과 함께 주로 고대극회실이나 고대 앞 다방에서 서울시내 각 대학극회들과 연영과 학생들을 접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맞은 겨울방학 기간 중 장두이는 1970년 이후 주로 부조리극을 해오던 고대극회의 흐름에서 벗어나 73년도 신입생환영공연으로는 사회풍자가 강한 독일극을 한 번 해보자는 의도로, 쿠르트 괴츠의 단막희극 <민나 막달레나(Minna Magdalena>를 레퍼토리로 선택하여 독문과 이명범(독문6?)에게 번역을 의뢰한 뒤 원고가 나오자 공연준비에 들어간다. 그리고 3월에는 그동안 고대극회 회장직을 버거워하고 점점 술을 과하게 마시며 대인관계에도 어려움을 겪던 김원(금속71) 회장 대신 다시 극회회장직을 맡는다.

괴츠의 사회풍자극 <민나 막달레나>는 대학교수 집 가정부 민나가 보이는 행동이 아무래도 임신을 한 것 같다고 의심한 교수부부가 민나의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서 벌어진 소동이 뒤늦게 도착한 병원진단서로 단순빈혈증상임이 드러나면서 헤피엔드로 종결되는 희극인데, 미혼모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꼬집으면서, 소시민계층의 토속적인 언어와 교수가 쓰는 추상적인 교양언어의 대조를 통해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한국에서는 1969년 극단 <프라이에 뷔네>가 드라마센터에서 개최한 세계무대예술의 날 기념행사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71년 3월 극단 <프라이에 뷔네> 제12회 공연(서근애 번역, 최병준 연출)과 7월 극단 <가교>의 만리포해수욕장 해변공연(김동욱 연출)에서도 상연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희극은 3월 개학 이후 고려대 <한맥> 회원들이 유신선포의 비민주성과 정치적 비리를 폭로하는 대자보와 <민우(民友)>라는 유인물을 비밀리에 교문과 교내에 게시, 배포하는 유신반대운동을 펼침으로서, 중정요원들이 현수막 소각과 유인물 배포사건의 주범을 색출하는 대대적인 소동을 벌이는가 하면, 무장한 수경사 군인들이 교내에 난입해 <한맥>회 간부 5명을 연행해가고, 많은 학생들이 그에 항의하는 등 험악해진 학내 분위기 때문에 결국 공연을 올리지 못하게 된다. 고대극회가 3월에 올리지 못한 이 <민나 막달레나>는 이해 5월 석탑축전 때 국문, 영문, 불문, 독문과가 참가한 문과대 단막극 경연대회에서 독문과 학생들에 의해 공연된다. 이 공연은 당시 극단 <프라이에 뷔네> 단원이었던 고금석(독문70)이 연출을 맡고, 교수 역에는 역시 프라이에 뷔네 단원이자 고대방송국 드라마국장이었던 황근(독문72), 교수 부인 역에는 예수정(독문73), 민나 아버지 역에는 김성렬(독문73)이 출연했다. 예수정과 김성렬은 이해 여름 모두 <프라이에 뷔네> 단원이 되고, 황근과 예수정은 75년부터 고대극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게 된다.

같은 5월 극회회장 장두이는 6월에 부산대학교극예술연구회가 개최하는 제4회 대학연극제에 고대극회가 참가해달라는 초청을 받는다. 그러잖아도 서울소재 대학연극 연합 모임을 추진하고 있던 그는 1970년부터 부산대극회(회장 김차웅, 지도교수 김영송) 주도로 부산소재 대학연극제로 치러지고 있던 이 연극제를 전국대학연극제로 전환하자고 제안하면서, 고대극회 최초이자 배우 장두이 최초의 1인극 <마지막테이프>를 가지고 참가하기로 한다. 1인극을 선택한 것은 역시 6월에 예정된 고대극회 정기공연 연습일정과 많은 인원이 장거리 이동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사무엘 베케트의 1958년 발표작으로 한국에서는 69년 그의 노벨상 수상 직후인 1970년 <까페 떼아트르>에서 박용기 연출, 정운용 주연으로 초연된 바 있는 <마지막테이프(La Dernière Bande)>의 내용은 소설가로서 실패한 크라프라는 한 노인이 70번째 생일날 매해 해왔듯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릴 테이프에 녹음하기 전에, 30년 전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들어보면서, 말의 기록이 삶을 기록하고 정리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덧없음을 더해줄 뿐이라는 걸 통감하면서도, 과거 소설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관계를 끊으려했던 한 여인과의 사랑을 회고하는 부분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다.

장두이 연출, 주연의 이 <마지막테이프>는 72년 6월 서울대문리대의 <문밖에서(이수찬 연출, 김광림 기획)>와 이화여대의 <련의 물결(박진 연출)>, 부산대의 <은하수를 아시나요(김해룡 연출)>, 동아대의 <우리읍내(김승일 연출)>과 같이 부산대 대학극장에서 상연되었고, 이때 스탭으로는 조연출 이충향(국문72), 무대감독 조학근(농학71), 의상 성병숙(임학73) 등이 참여하였다.

부산대 대학연극제 참가 전인 5월 어느 날 장두이는 혜화동에 있던 서울대 문리대 연극부의 <문밖에서> 공연을 보러갔다가 그곳 화장실에서 <야생화>라는 제목의 유인물 책자를 발견하고 읽어보기 위해 가방에 넣는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남산 대공분실에 끌려가 사흘간 구타를 당하다가 풀려나게 되는데, 이때 그는 그 대공분실 사무실에서 자신보다 뒤늦게 연행되어온 전임 극회장 김원(금속71)과 서로 먹먹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게 된다.

그 <야생화> 지(誌)는 71년 10월 위수령 때 고려대 학생써클 <한맥>과 함께 강제해체당한 <한사회> 즉 <한국사상연구회>를 72년 6월 철학과 김충렬 교수를 지도교수로 다시 재건한 <등림회(登臨會)>의 서클회보 <등림회보(登臨會報)>의 글들과 이전 <한사회보>에 실렸던 글들을 누군가가 다른 내용의 글들과 같이 짜깁기하여 ‘야생화’라는 제목에 ‘검은 시월단’ 발행이라는 고무인까지 찍어놓은 소책자로 실상은 등림회 회원들이 만든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이 고대 내는 물론 학교 밖까지 나돌아 다녔던 것이다.

그러던 중 5월 24일, 중앙정보부는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다. 그동안 고려대 교문 앞 현수막 소각 사건과 <민우>지 배포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라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8년 전에 월북한 전과가 있는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이자 교수였던 김낙중 교수를 배후로 지목하여 그에게는 간첩혐의를 씌우고, 한맥회 회원 10명에게는 ‘NH회’(Nationalism과 Humanism의 약칭)이란 반국가단체를 조직하고 불온유인물을 살포한 등의 혐의로 모두 13명을 반국가활동 혐의로 구속 송치한다. <민우지 사건> 또는 <NH회>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서울에서 제일 먼저 유신반대 운동에 나섰던 고려대 학생운동에 ‘북한과 내통했다’는 빨간 딱지를 붙여 그 맥을 끊어놓기 위한 유신이후 최초의 공안조작사건이었다.
▲ 73년 고려대 <민우지 사건> 공판 장면
▲ 73년 고려대 <야생화지 사건> 공판 장면

한편 5월에 개시된 <야생화>지 배포사건 수사로 <등림회> 회원 제철(경영70), 최영주(국문70), 박원복(정외71), 유경식(법학71), 김용경(법학71), 유영래(정외70), 이강린(산공학71) 7명을 남산 대공분실로 끌고 가 고문을 하던 경찰도 이후 그들을 내란음모죄로 구속 송치하는데, 일명 <검은 시월단>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공안조작사건 수사 과정에서 고대극회 전임회장인 김원(금속71)과 당시회장이었던 장두이(국문70)도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장두이는 대학연극연합회 결성과 부산 대학연극제를 위해 많은 연극학도들을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고대극회를 비롯한 많은 연극학도들이 내란음모죄로 엮여 들어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72년 유신방학 때에 이어 여러 차례 대공분실에 끌려갔던 전임회장 김원은 이 이후로 걸어 다닐 때 제식훈련동작으로 걷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었다고 한다. 당시의 그런 증상을 고문후유증으로 보는 동우가 있는가 하면, 72년 봄 극회회장을 맡은 이후 회원들과 술을 많이 마시고 주정이 심했던 걸로 볼 때 알코올 중독 증세일 것이라고 보는 동우도 있지만, 같은 시기 끌려갔었던 장두이의 경험으로 볼 때 어쨌든 그가 시대의 희생양으로서 많은 고초를 겪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야생화(검은 시월단) 사건>의 피의자들은 당시 5~10년의 중형을 구형받았지만, 이듬해 2월 2심에서 전원 집행유예로 석방조치되었고, <민우지(NH회) 사건>의 피의자들은 1974년 6월 대법원에서 집행유예에서 징역5년까지의 형이 확정되었지만, 최근 2017년 재심에 들어가 최종 재심 재판부에서 무죄를 선고하면서 "권위주의 시대에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며 토론하고 질곡의 역사를 개선해보려던 젊은 지성인들이 위법,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심대한 고통을 겪고 살아야 했”던 것에 대해 “국가를 대신해 용서를 구한다”고 사죄한 바 있다. 이 사건은 현재 검찰의 항고로 대법원 최종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5월의 그런 진통이 있은 후 장두이는 회장직을 정동천(토목72)에게 넘겨주고 제36회 정기공연으로 이오네스코의 <대머리여가수(이가형 번역)>를 직접 연출하여, 73년 6월 14~16일 시청각교육실에서 4차례 막을 올린다. 1970년에 이어 다시 <대머리여가수>를 극회 레퍼토리로 선정한 것은 1학년 때 내용도 모르고 했던 작품을 제대로 공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동천(토목72) 기획의 이 공연에 스탭으로는 조연출에 이충향(국문72), 허훤(신방73), 무대감독에 정성환(국문71), 김웅래(영문67), 조명에 정병웅(전자72), 나혜련(원예72), 음향효과에 현혜봉(중문72), 분장에 현병숙(사학72), 의상에 장연숙(가정73), 소품에 강원주(국문73)가 참여했고, 배우로는 스미스 역에 정동천(토목72), 스미스부인 역에 성병숙(임학73), 마틴 역에 김동일(신방73), 마틴 부인 역에 안희옥(국문72), 소방서장 역에 조원선(체육73), 메리 역 김지희(간호73)가 열연했는데, 이 공연은 이해 9월 서강대극장에서 개최된 <제1회 대학인의 무대>에서 마틴 부인 역이 김지희(간호73)로, 메리 역(장연숙(가정73)으로 바뀌어 한 번 더 상연된다.
▲ 73년 5월 <대머리여가수> 연습장면(성병숙, 조원선, 정동천)

이때 스미스 부인 역을 맡았던 성병숙(임학73)은 입학하자마자 극회실 문을 제일 먼저 두드렸던 1학년 여학생으로 고대방송국에서도 활동했는데, 그녀가 <대머리여가수>에 배우로 참여하기 전, 회장 정동천(토목72)은 연극활동을 반대하던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가 연습이 끝난 후 반드시 집에 데려다주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고, 통금이 있던 그 시절 연습기간 내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여학생 회원들이 무슨 잘못을 하면 남학생들이 대신 ‘빳다’를 맞는 특이한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연 때는 그녀도 1970년 <대머리여가수> 때와 마찬가지로 첫 회에 대사를 건너뛰는 바람에 공연시간이 5분 정도 짧아졌었다고 한다.
▲ 재학시절의 성병숙

성병숙은 75년 3학년 때 우리나라 개그프로그램의 효시인 TBC-TV 김웅래(영문67) 연출의 <살짜기 웃어예>에 최미나, 임성훈, 전유성, 김병조, 강석 등과 함께 출연하게 되는데, 한 학기 정도 활동했을 때 학칙상 재학생 신분으로는 연예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없다는 지적을 받고 활동을 접어야했다. 그리고 77년 TBC성우 9기로 입사한 그녀는 김웅래 PD를 다시 만나 당시의 개그프로그램 <달려라 청춘(김웅래 연출)>의 <7학년 1반(‘봉숭아 학당’의 원조)> 코너에 출연하게 된다. TBC라디오에서 가족드라마 <아차부인 재치부인>의 해설자 역을 하기도 하고, <7시에 만나요>, <FM 가요앨범>의 DJ를 맡기도 하며, TBC-TV에서 놀라운 능력자들을 소개하는 오락프로그램 <나의 비밀은>, 어린이프로 <야, 일요일이다>의 MC로도 활약하다가, 80년 방송통폐합 이후로는 KBS라디오의 퀴즈프로 <가위바위보> 진행, <정오의 휴게실>, <FM 가요앨범> DJ와 KBS-TV의 예능프로그램 <젊음의 행진>, 어린이프로 <하나 둘 셋>의 MC 및 <전국일주> 리포터 등을 맡았던 그녀는 KBS <달의 요정 세일러문(에스메랄다 역)>, <이상한 나라의 폴(버섯돌이 역)>, 투니버스 <뽀빠이(올리브 역)> 등의 에니메이션과 <코스비 가족만세(’88~92)> 등 수많은 외화 프로그램의 더빙도 담당한다.

또한 1985년 고대극회 선후배 합동공연 <시련>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제작극회의 <탱자꽃(1986)>, <연애수첩(1987)> 등의 연극무대에도 서게 되면서, 91년 극단 산울림의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원작, 윤석화 각색>로 사랑의 연극제 최우수조연상을 받고, <핏줄(’92)>, <열개의 인디언 인형(’92)>, <에쿠우스(’93)>, <이혼의 조건(’94)>,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94)>,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95)>, <아름다운 거리(’96)>, <돼지와 오토바이(’97)>, <발칙한 미망인(’04)>, <친정엄마(’07)>, <늙은 부부 이야기(’07)>, <꿈꿔서 미안해(’07)> 등에 출연하면서, 2007년 ‘올해의 연극배우상’을 수상한 이후, <여보, 고마워(’09, ’11)> <그 여자의 소설(’11)>, <내가 가장 예뻤을 때(’10, ’15)>, <황금연못(’14)> 등의 수많은 연극작품에 계속 출연해오고 있다.

또한 93년 MBC시트콤 <김가이가(김승수 연출)> 출연 이후, <문희(’07 이재길 연출)>, <시크릿 가든(’10)>, <별에서 온 그대(’13)>, <미생(’14)>, <화정(’15)>, <피고인(’17)>등의 TV드라마에도 출연하고, 영화 <식객(’07)>, <해운대(’09)>, <애자(’09)>, <황해(’10)>, <댄싱퀸(’12)>, <코리아(’12)>, <변호인(’13)>, <럭키(’16)>, <부라더(’17)>, <덕구(’18)> 등에서도 점점 더 원숙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그녀는 2015년 ‘올해의 여성대상’ 문화예술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MBC드라마 <문희> 출연당시의 성병숙(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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