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2018년)

고대극회사 1974

犬毛 - 개털 2018. 7. 27. 15:12
8. 유신독재에 대한 비판을 담았던 <만리장성>, <만하탄의 선신>, <다섯> 및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1974)

68년 겨울 연극과 독일어를 진로로 삼겠다 결심하고 <고대극회>와 <프라이에 뷔네> 활동에 열정을 불태웠다가 69년 김창활의 <천대받은 자와 밤의 대화> 표절에 대한 여석기 교수 및 연극계 원로들의 대응에 크게 실망하여 군 입대를 해버렸던 김승수(독문67)는 73년 8월 제대 후 <프라이에 뷔네> 연극에 참여하다가 복학을 앞두고 여석기 교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아무래도 자네가 극회를 좀 맡아줘야겠네.”라는 부탁의 말을 듣고 74년 2월 장두이(국문70) 졸업 후 회장 겸 연출을 맡아 다시 <고대극회>에 열정을 기울인다.
▲ 김승수(1974)

그는 고대극회의 74년 봄 정기공연으로 한국 최초로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브레히트는 공산권 작가로 분류된 금지작가라 공연이 불가능했기에 대신 선택한 레퍼토리가 브레히트의 추종자인 스위스 극작가 막스 프리시의 서사극 <만리장성(Die Chinesische Mauer. Ein Farce)>이었다.

<프라이에 뷔네> 단원 유진옥이 번역한 이 <만리장성>은 진시황제의 축하연에 여러 역사상 인물들과 함께 등장한 현대인에게 우창과의 정혼이 공표된 황제의 딸 미란이 관심을 보일 때, 황제를 비방한 혐의로 붙잡혀 고문을 받던 벙어리 민꿔(民哭 민중의 통곡이란 뜻)의 재판에서 진시황제는 민꿔가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극도로 흥분하는데 변호를 맡은 현대인이 그에 침묵을 지키자 공주 미란은 그를 경멸하고, 현대인은 세상이 이래선 안 된다고 열띤 연설은 가능하나 세상은 모순을 지닌 채 유지되는 것이라고 변명하다가 황제로부터 황금목걸이를 받게 되는 순간, 미란의 변심에 분노한 우창이 민꿔(民哭)를 내세워 일으킨 폭동으로 황제는 몰락하고 미란은 윤간을 당하며 그동안 아무 역할도 못했던 민꿔의 어머니 올란은 자기 아들이 벙어리가 아니라고 거짓말하며 민주열사의 어머니로 칭송받는 상황에서, 폭동이 지나간 폐허위에 윤간을 당한 미란과 자존심 상한 무기력한 지식인인 현대인만 무대 위에 남으면서 극이 끝나는 서사극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의 고문과 강압정치를 연상시키는 이 <만리장성>은 성북경찰서의 검열에 걸려, 성북서의 압력을 받은 여석기 교수가 고대극회의 능력으로는 과한 작품이라는 이유를 들어 다른 작품으로 바꿀 것을 종용하고, 경찰도 레퍼토리를 바꾸지 않으면 회장을 연행해가겠다고 함에 따라 연습이 중단된다.

이때 무산된 국내초연작 <만리장성>은 김승수가 이듬해 75년 극단 <프라이에 뷔네>에서 다시 시도하여, 김승수 연출, 김성렬 기획으로, 진시황제 역에 고금석(독문70), 미란 역에 박경희, 우창 역에 장두이(국문70), 민꿔 역에 진유영, 올란 역에 예수정(독문73), 콜럼부스 역에 황근(독문72), 푸추 역에 주강현, 빌라도 역에 길용우, 돈 주앙 역에 박영규, 클레오파트라 역에 이경실 등이 출연하고, 무대감독 이제창(원예67), 드럼 김창화(물리72) 등이 참여하여, 처음엔 6월에 서강대 극장에서 상연하려 했으나 경찰의 압력과 학교 측의 반대로 무산됐다가, 다시 극장을 명동국립극장으로 바꾸고 대관신청 주체도 치외법권을 지닌 ‘독일문화원’으로 바꿈으로써 7월 22~23일 결국 초연되었다.

많은 연극인들이 그 대담성과 재미, 공연규모에 놀라고, 김문환 등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이 서사극 <만리장성> 공연은 당시 갓 독일에서 무대를 공부하고 돌아온 무대장치가 조영래를 발탁하여, 무대 위의 만리장성을 그해 유신정권의 동아일보 탄압 때문에, 동아일보가 백지광고를 내고, 수많은 시민들이 개인광고를 실었던 신문지면들로 도배하여 표현함으로써 ‘연극을 통한 사회변혁’을 꾀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 국내초연 서사극 <만리장성> 포스터

74년 봄 극회의 <만리장성>이 무산되던 무렵인 74년 4월 3일 저녁, 박정희는 당시 유신반대운동을 전개하던 이철, 유인태 등의 대학생들에 대해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인민혁명당)의 배후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는 요지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 당시 중앙정보부의 민청학련 수사결과 발표 보도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김승수 회장이 무산된 <만리장성>의 대체작으로 다시 선택한 레퍼토리는 막스 프리시의 연인이었던 독일의 여류서정시인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방송극 <만하탄의 선신(善神)(Der gute Gott von Manhattan)>으로, 이해 1월 극단 <프라이에 뷔네>에서 김상경 연출, 김승수 기획에 고금석(독문70) 주연(얀 역)으로 국내 초연됐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미국 맨해튼에서 여대생 제니퍼가 유럽인 청년 얀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사랑으로 새 세상이 시작될 수 있다는 그들의 믿음이 그들이 묵는 호텔의 층수처럼 점점 높아져갈 때, 질서의 틀을 넘어서는 그 ‘타락한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긴 선신(善神)이 그들을 살해하려하자, 얀은 사랑을 버리고 도망쳐 살지만, 제니퍼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고, 그 후 법정에서 재판관이 그 죽음을 방조한 선신을 구속하지 않고 풀어준다는 이야기를 통해 현실적 장애를 거부하는 열정적 사랑과 틀에 짜인 견고한 사회질서와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작품인데, 언뜻 볼 때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로 도덕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 작품은 경찰의 검열을 통과했다.
▲ 고대극회 <만하탄의 선신> 포스터

이 작품을 연출 김승수는 팸플릿에서 “분명, 우린 지금 주민등록증에 기재되어 있는 그 주소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있는 세계’가 ‘있어야할 세계’가 될 수는 없다. ‘있어야할 세계’로의 탈출과 노력,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인식과 방황을 해야만 한다. - 특히 청년들은 더욱 더”라고 연출의도를 밝히면서, 당시 그가 ‘연극을 통한 사회변혁’의 방법이라고 믿었던 ‘서사극’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이러한 김승수 연출, 이규상(영문69) 기획의 제38회 정기공연 <만하탄의 선신>에 출연배우로는 여주인공 제니퍼 역에 배현나(심리74)가 캐스팅되었고, 남주인공 얀 역은 처음에는 도창환(건축72)이 캐스팅되었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도중하차하고 이찬(건축74)으로 바뀌었다. 그밖에 선신 역에는 민봉준(토목74), 재판관 역에는 윤흥식(신방69), 빌리 역에 이백철(중문74), 프랭키 역에 정진형(심리74), 집시 역에 박현윤(생물74), 악사(드러머) 역에 김창화(물리72), 바이올리니스트 역에 김효신(간호73), 목소리 역에 박선희(사학73), 김명희(사학73), 허연주(생물73), 강영은(생물73), 박영숙(심리74)이 참여했다.
▲ <만하탄의 선신> 주요 캐스트

스탭으로는 조연출 이충향(국문72), 무대감독 정동천(토목72), 무대장치 정초영(노문74), 한상준(교육74), 조명 이원재(심리73), 배홍렬(공학74), 분장 정동천, 의상 박영숙(심리74), 소품 임봉수(공학74), 사진 강수관(지질74)이 참여했고, 음악과 안무 또한 공연의 중요한 요소로 작곡은 강준혁(서울음악학회)이, 지휘는 장현진(독문71), 도창환(건축72)이, 안무는 정의숙(이대 무용과)이 맡았다.
▲ 강준혁과 정의숙

이때 작곡을 맡았던 강준혁은 작곡가 강준일의 동생으로 중학시절부터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다가, 66년 서울대 미학과 입학 후 고교친구들과 조직한 음악캠프를 계기로 68년 강준일, 금난새 등과 함께 서울음악학회를 창립한다. 이후 77년부터 <공간사랑> 극장장(’77~88)으로 일하면서 <사물놀이>, <공옥진의 1인창무극> 등 다양한 공연들을 기획하며 우리나라 문화기획 1세대가 되는 그는 88년 이후 그가 창립한 <스튜디오 메타> 또는 개인자격으로 <춘천인형극제('89)>, <안동탈춤페스티벌('97)>, <전주세계소리축제('01)>, <세계평화축전('05)> 등 대표적인 문화예술축제를 만들고, 99년 <아비뇽 페스티벌 한국주간> 예술감독으로도 활약하면서 그해 사단법인 다움문화예술기획연구회를 창립한 뒤, 추계예술대 예술경영대학원장(2000~03), 성공회대 문화대학원장(’04~13)을 역임하다가 2014년 타계하였다. 또 이때 안무를 맡은 이화여대 학생 정의숙(무용71)은 이후 뉴욕대학원 무용학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92년 성균관대 무용학과 교수가 되어 99년 아지드현대무용단을 창립한다.
▲ <만하탄의 선신> 코러스 악보(강준혁 작곡)

이들이 준비한 제38회 정기공연 <만하탄의 선신>은 이해 6월 14~16일 3일간 시청각교육실에서 5회에 걸쳐 상연함으로써 초만원의 관객을 이룬 가운데 절찬리에 성황의 막을 내렸다. 이때 김승수 연출은 제니퍼 역의 배현나에게 살색 타이츠를 입혀 무대 위에 출연시킴으로서 성애장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도록 했는데, 그녀의 심리학과 74학번 동기 남학생들이 공연관람 후 그녀를 나체로 출연시켰다고 집단으로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공연 시 무대장치로서 ‘다양한 변형’을 통해 ‘융통성’의 ‘묘’를 발휘했던 철제구조물을 졸업한 동우 김청조(독문64)가 돈을 주고 구입해 집으로 가져감으로써 당시 적자가 난 고대극회의 재정을 메워준 일도 있었다. 그 구조물은 이후 그녀의 아들 양정웅(현 극단 여행자 대표)의 놀이터가 되었다.
▲ 김승수 연출, 정의숙 안무의 제38회 정기공연 <만하탄의 선신> 공연장면들

이 공연 시 실시한 앙케이트에 응답한 관객 210명은 교내 ‘전용극장 건립’을 가장 시급한 문제로 꼽았다. 무더운 6월에 공연했던 탓도 있었으나 사학의 명문종합대학이라는 고려대학교가 고대연극 100년이 된 지금도 다른 대학들에 다 있는 극장이 없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다음으로는 많은 관객들이 다음 레퍼토리로 창작극을 주문했다. 번역극이 아닌 ‘창작극 공연’이란 과제는 타 대학도 대동소이하게 지니고 있던 문제였으나, 1960년 12월 나영세(영문58)가 <고대신문>에서 고대극회가 안고 있는 문제로 지적했던 ‘극장 건립’과 ‘창작극 공연’이란 두 가지 과제는 이 당시 74년 6월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해에도 고대극회는 부산대가 주최하는 제5회 전국대학연극제(6.6~8)에 참가하기로 했으나, <만리장성>의 무산으로 정기공연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결국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해 부산대의 <알섬(김차웅 작)>, 서울대문리대의 <돼지꿈(황석영 작)>, 서울대치대의 <양반놀음(박지원 원작)> 3개 팀만 참가한 이 대학연극제는 이해를 마지막으로 끝난다.

그 후 7월에 들어 제2회 <대학인의 무대> 참가준비회의를 주재했던 김승수 회장은 이후 회장직을 김창화(물리72)에게 넘긴다. 전해에 서강대극회가 주관했던 <대학인의 무대>는 이번에는 고대극회가 주관을 맡아, 정동천(토목72)이 기획위원장이 되고, 기획위원으로는 고대의 김창화, 서강대의 서승완, 서울대문리대의 김영호, 연대의 김석환, 이대의 김영희, 숙대의 김연진이 선임되었다. 이러한 제2회 <대학인의 무대>에는 고대극회가 <다섯(이강백 작, 이충향 연출)>, 서강연극회가 <한강수야! 한강수(문호근 작, 홍경택 연출>, 서울대문리대연극회가 <목소리(윤대성 작, 김상진 연출)>, 연희극회가 <삼각목마(정하연 작, 문치항 연출)>, 이대문리대연극부가 <파수꾼(이강백 작, 이혜경 연출)>, 숙대연극부가 <열한개의 출산(김용락 작, 이영숙 연출)>으로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전년도 <알>의 경우처럼 이대 문리대의 이강백 작 <파수꾼>은 검열에 걸려 공연되지 못하였고 서울대 문리대의 <목소리>도 마지막 회까지 공연되지 못하였다. 이 연극제에 참여한 서강대의 문성근(무역72)과 서울대의 박인배(물리72), 연세대의 오세곤(불문74), 이대의 이혜경(사회71) 등은 훗날 유명 배우 및 연출가가 된다.

이때 고대극회가 선택한 단막극 <다섯>은 당시 <알(’72)>, <셋(’72)>, <파수꾼(’73)>, <결혼(’74)> 등을 발표하며 권력과 군중 간의 관계를 우화적으로 표현해오던 신진극작가 이강백의 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당선작이자 그의 첫 데뷔작으로, 고대극회가 초연한 이 공연에 작가 이강백이 직접 찾아와 관람하고 격려해주기도 하였다.
▶ 이강백

이 작품은 낙원의 땅 ‘신 탐라국’으로 데려다주겠다는 선장의 꾐에 넘어가 가, 나, 다, 라, 마라는 5명의 시민들이 돈을 주고 밀항선을 타 배 밑 창고에 숨어 지내지만,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선장이 수시로 울리는 경보음과 신호등 불빛에 따라 5명이 생선을 담는 통속에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이야기를 통해, 마치 72년 유신독재의 출현을 예언하기라도 한 것처럼 독재자와 전체주의국가 국민들의 모습을 풍자한 반연극(Anti-theatre)적 희곡이다.
▲ 74년 <다섯> 공연장면

이러한 <다섯>의 연출은 전해부터 고대극회의 <마지막테이프(’73)>, <대머리여가수(’73)>, <노름의 끝장(’73)>, <만하탄의 선신(’74)> 조연출을 맡아왔고, 국문과의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서방님 역을 했으며, 극회와는 별로도 장두이의 창작극 <표류지>와 기 프와시의 <아버지의 연설>을 연출하기도 했던 이충향(국문72)이 맡았고, 기획은 회장 김창화(물리72)가 맡았다.
▲ 이충향

배우로는 가 역에 정초영(노문74), 나 역에 이원재(심리73), 다 역에 정동천(토목72), 라 역에 민봉준(토목74), 마 역에 박영숙(심리74)가 참여했고, 스탭으로는 무대감독에 윤홍섭(기계73), 무대장치에 임봉수(공학74), 전완종(공학74), 조명에 이동희(토목73), 이백철(중문74), 의상에 배현나(심리74), 정진형(심리74), 효과에 임봉수(공학74), 이찬(건축74), 분장에 최유진(물리70), 사진에 강수관(지질74), 진행에 조원선(체교73), 김경일(전기74)이 수고했는데, 이때 효과는 선장의 경고음 효과로 임봉수가 대북을 치고 이찬이 경쾌한 리듬의 Live Drum을 쳤었다고 한다. 이들이 참여하여 1974년 9월 11일, 13일, 15일 저녁7시 3회에 걸쳐 서강대학교 극장에서 상연된 이 단막극 <다섯>은 현재 고대극회 연보에 제12회 워크숍공연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 1974년 9월 <다섯> 공연 참가자들
(앞1열 : 임봉수, 이찬, 조원선 / 중간2열 : 정초영, 이원재, 박영숙, 정동천, 민봉준 / 뒤3열 : 김경일, 전완종, 이충향, 이규상, 김창화, 강수관, 윤홍섭

이 공연 뒤 극회는 이해 가을 정기공연작으로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Sei Personaggi in Cerca d'Autore)>을 선택했다. 관객들에게 다층구조 속에 있는 거짓과 진실, 연기와 실제와의 모순되고 혼란한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추악한 모습과 냉혹한 현실에 환멸과 분노, 연민까지 체험하게 하는 이 작품은 최유진(물리70)이 연출을 맡아 광화문에 있던 김창화 회장의 집에서 조원선(체육73), 박준근(식공74) 등이 연습을 했고 11월 21일부터 사흘간 공연예정이었으나 결국 막을 올리지 못하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위축됐던 대학가의 유신반대시위가 10월부터 다시 격렬히 전개된 때문이었다.
▲ 74년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고대신문> 예고기사

고대생들은 10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연 3천여 명이 ‘유신헌법 개정, 구속학생 석방, 언론자유 보장, 학원사찰 중지’ 등을 외치며 교정과 교문에서 시위를 벌였고, 12일부터 임시휴강에 들어갔다. 그러나 개강 첫날인 28일부터 다시 1,500여 명의 학생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여 29일 학교는 다시 휴강에 들어갔고, 11월 12일 다시 개강을 했으나 학생들의 내연(內燃)이 계속되자 학교당국은 18일부터 12월 25일까지 조기방학을 발표하고, 이로 인한 법정수업일수 미달로 이듬해 1월과 2월에도 보충수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당시 전대학가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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