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2018년)

고대극회사 1973 하반기

犬毛 - 개털 2018. 7. 27. 15:09

7. <대학연극연합회>와 제1회 <대학인의 무대> 그리고 <노름의 끝장> 초연 (1973 하반기)

73년 6월 <대머리여가수>에서 소방서장 역을 했던 조원선(체육73)은 그 공연을 보러 오신 부모님들께서 공연관람 후 “도대체 뭔 소린지, 그걸 연극이라고? 야, 이 미친놈아 당장 그만둬!”하고 야단을 치셨다한다. 그러잖아도 아들이 매일 밤늦게 들어오고 외박도 잦았던 게 마뜩찮았던 부모님은 그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연극 때문이었다는 것이 기가 찼던 것이다. 조원선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은 그해 여름방학 때 또 일어났다.
▲ 조원선(1973)

어느 날 느닷없이 삼송리에 있던 그에 집에 경찰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들은 그의 방을 천장까지 찢어 샅샅이 뒤지더니 그의 아버지에게 젊잖게 참고인으로 잠시 데려가겠다면서 슬리퍼 차림의 그를 동대문경찰서로 연행해갔다. 취조실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태도를 돌변하며 전임 극회회장 김원(금속71)과는 언제 언제 만났느냐, 그와 술을 마실 때 학사주점(당시 고대 앞에 있던 주점)에서 누구누구를 만났느냐? 등등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 화장실에 뭘 놓고 나왔지?”라고 묻는 질문에 “오줌을 놓고 나왔는데요.”라고 대답했다가 뺨을 한 대 맞았다. 발끈한 조원선이 취조관에게 대들자, 두 명의 형사가 달려들어 그를 마구 짓밟았다. 5월 <야생화지 사건> 수사의 여파가 이 무렵 아무 것도 모르는 1학년생 조원선에게까지 미쳐, 전임회장 김원과 술자리를 자주 했다는 이유로 그를 김원의 수하 행동책으로 지목한 것이었다. 그는 2박3일간 잠 한 숨 못자고 구타를 당하며 학사주점에 갔던 시기, 거기서 만난 사람, 나누었던 얘기 등등에 대해 한 뭉치의 진술서를 써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그를 족쳐도 아무 것도 나오는 것이 없자 3과장이란 사람이 사상이 불온한 서클활동은 하지 말고, 불온한 선배들과 어울리지 마라, 너희 아버지 공무원 아니냐, 이번 일은 발설하지 말라 등등의 훈시를 하고 명함 한 장과 버스비를 주며 그를 풀어줬다. 그 명함은 이후 장발단속에 걸렸을 때 유용했지만, 이때의 조사기록 때문에 그는 군복무 시절 비밀취급 인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72년 가을부터 <대학연극연합회> 창립을 위해 기울여온 장두이의 노력은 이 무렵 어느 정도 결실을 보기 시작한다. 그는 애초에 연극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이든 연극을 전공하는 학생이든 연극을 하는 학생들이면 모두 다 모이기를 원했지만, 일단 당시 서울시내 몇몇 대학연극반들이 모임에 동의함에 따라 그들이 함께 <대학인의 무대>라는 서울소재 대학연극제를 9월에 갖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고대극회 회장 정동천(토목72)은 전임화장 장두이와 같이 상의해가면서 문성근(서강대 무역72), 명계남(연대 신학72), 이혜경(이대 사회71), 김광림(서울대 불문71) 등과 함께 제1회 <대학인의 무대> 개최를 추진하기에 이른다.
▲ 제1회 <대학인의 무대> 팸플릿 표지

73년 9월 5일부터 9일까지 서강연극회(기획위원장 손상진) 주관으로 서강대학교 극장에서 개최된 이 제1회 <대학인의 무대>에 고대극회는 6월에 교내에서 공연했던 <대머리여가수>로 참가했는데, 이때 연출 장두이는 학교공연 시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관객들이 많았던 점을 고려하여 조금이라도 더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처음 공연을 시작할 때 무대 하수(왼쪽) 안쪽에서 마이크를 들고 “이것은 이른바 상징극도 아니오 심리극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해주고 있을 뿐입니다.”라는 도입의 말과 함께, 공연이 진행됨에 따라 대본에 쓰여 있는 지문을 읽었다. 아마 대한민국 연극 역사상 지문을 읽어주는 연극공연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 73년 9월 <대학인의 무대> 팸플릿 내 <대머리여가수> 소개내용

이 <대머리여가수>의 스탭으로는 기획에 정동천(토목72), 무대감독에 정성환(국문71), 김웅래(영문67), 조명에 정병웅(전자72), 나혜련(원예72), 음향효과에 이충향(국문72), 허훤(신방73), 의상에 김창화(물리72), 소도구에 강승종(생물73), 분장에 강원주(국문73), 박보균(정외73), 진행에 조학근(농학71), 박흥식(신방71)이 참여했고, 배우로는 스미스 역에 정동천(토목72), 스미스 부인 역에 성병숙(임학73), 마틴 역에 김동일(신방73), 마틴 부인 역에 김지희(간호73), 메리 역에 장연숙(가정73), 소방서장 역에 조원선(체육73)이 참여하여, 9월 5일 및 9일에 두 차례 상연했다.

이때 공연을 본 당시 고대 문과대 영어강사 남용우(보전 법학40, 훗날 수필가, 단국대 영문과 교수)는 그가 27년 전 고대극회 제1회 공연 <청춘회상곡> 이후로 처음 본 이 고대극회 공연에 대해 “젊은이들의 무한한 힘과 박력”을 느꼈으며, “관객들이 모두 열광적인 박수”를 보낼 때 자신도 박수를 치다가 “차고 있던 시계의 날짜판과 분침, 초침이 다 떨어져나갔다.”라고 기술한 연극평을 고대신문에 기고했다.

그렇게 고대극회의 <대머리여가수>, 서강연극회의 <아폴로! 아폴로!(장 지로두 작, 손상진 연출>, 서울대문리대연극회의 <강요된 비극(체홉 작, 박윤행 연출)>, 연희극회의 <동물원 이야기(에드워드 올비 작, 장제훈 연출)>, 이대문리대연극부의 <알(이강백 작, 이정자 연출)> 5개 대학 5작품이 상연된 제1회 <대학인의 무대>는 많은 관객들이 몰려와 흥행적으로도 대성공을 이루었다.

이후 9월 27일에는 그동안 장두이가 서라벌예대 영연과 임준빈과 함께 전해 가을부터 주도적으로 추진해온 <대학연극연합회(회장 임준빈)>의 창립총회가 명동 카톨릭학생회관에서 열린다. 마침내 고려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가톨릭의대, 서울대, 건국대, 경희대 국민대, 덕성여대, 동덕여대, 단국대, 상명여사대, 서울여대, 성균관대, 성신여사대, 수도여사대, 숭전대 외국어대(이상 비전공계열) 서라벌예대, 동국대, 중앙대, 한양대(이상 전공계열) 등 22개 대학연극부원 180명을 회원으로 하는 자발적 대학극단체가 정식출범을 공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에 의한 이 자발적 대학극단체는 이듬해 장두이가 졸업한 이후로 전공계열이 빠진 일부 비전공계열 중심의 <대학인의 무대>를 한 차례 더 개최하는 것 말고는 그 맥이 계속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많은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 73년 <대학연극연합회> 창립기사(경향신문)

그 후 10월에는 국문과 학생들과 <양주별산대놀이>를 추진, 공연했던 장두이는 이해 10월 30일 “학생들의 무관심과 물질적인 여건의 불리함 속에서도 4년간 꾸준히 연극 활동에 전념, 왕년의 고대극회의 전성기를 되찾는데 노력했으며, 거교적(擧校的)인 문화풍토를 조성 이를 타교에까지 파급시킨 점 등이 높이 평가되어” 제12회 <고대신문 문화상> 학예부문 수상자로 발표되었고, 11월 3일 김상협 총장으로부터 상금 5만원과 함께 그 상을 받았다.
▲ 장두이(1973)

이 무렵 고대극회는 제37회 정기공연으로 베케트의 1957년 작 <노름의 끝장>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일반극단에서는 이후 1977년 극단 <자유극장>이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승부의 종말>이라는 제목에 최치림 연출로 처음 공연하게 되지만, 고대극회가 그보다 4년 앞서 국내초연을 한 것이다. 베케트의 두 번째 희곡 <노름의 끝장(Fin de Partie 정확한 번역은 유희의 끝)>은 우정과 사랑을 중시하지만 반신불수의 상태로 휠체어에 의지한 맹인 크로브와 그의 동료 함, 넬, 나그의 비참한 상황을 통해 <고도를 기다리며>보다 더욱 더 절망적인 실존상황을 보여주는 부조리극인데, 고대극회는 이 작품을 원래 11월 22일부터 공연하려 했으나, 24일로 연기했다가 다시 12월 8일로 연기하여 10일까지 3차례 공연했다.
▲ 제37회 정기공연 <노름의 끝장>의 초대권 및 동아일보 문화단신 기사

이렇게 공연을 계속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의 학원사태 때문이었다. 유신정권의 무자비한 공안탄압으로 그동안 유신반대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던 대학가에서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처음 시위를 시작한 이래로 점차 확산되더니, 10월 26일 고려대 총학생회(회장 정세균)가 ‘학원의 자율’과 ‘(민우, 야생화 지 사건 관련) 구속학생들의) 조속 학원 복귀’ 등을 결의하고,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 교내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2,500여 명이 가담한 15일의 시위가 과열상태를 보이자 학교당국이 23일까지 휴강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하반기 정기공연 <노름의 끝장>은 장두이 연출, 정동천 기획에, 스탭으로는 조연출 이충향(국문72), 무대감독 김창화(물리72), 무대장치 양희찬(국문73), 조명 강승종(생물73), 음향효과 조원선(체육73), 임동환(신방73), 분장 이원재(심리73), 의상 최영희(신방73), 소품 김갑식(국문73), 진행 김지희(간호73), 김말숙(영문72)가 참여했고, 배우로는 크로브 역 도창환(건축72), 함 역에 박흥식(신방71), 나그 역에 함덕용(식공73), 넬 역에 장연숙(가정73)이 열연했다.
▲ <노름의 끝장> 무대스케치

이 중 크로브 역의 도창환(건축72)은 79년 김수근의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에 입사하여 1981년 개관되는 대학로 문예회관 건축에 참여함으로써 오늘날 아르코 대극장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붉은 벽돌 디자인을 담당하고, 1990년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 그룹으로 곽재환, 김병윤, 김인철, 동정근, 민현식, 방철린, 백문기, 승효상, 우경국, 이성관, 이일훈, 이종상, 조성룡과 함께 14명의 젊은 건축가들이 모여 학연과 이념에 좌우되지 않는 작가주의 건축문화를 표방, 확산시킴으로서 한국 건축문화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뤘던 <4.3그룹>의 동인으로서 지금까지 한국건축문화에 큰 기여를 해오고 있다.
▲ 도창환(1973)


한편 고대극회의 <노름의 끝장> 공연 전에, 고대방송국에서도 개국10주년기념으로 정성환(국문71) 작, 연출의 <맴>과 장두이(국문70) 작, 이충향(국문72) 연출의 <표류지>라는 두 편의 창작극을 준비하여 11월 14일부터 21일까지 고대방송국 스튜디오에서 공연할 계획이었으나, 역시 민우, 야생화 지 관련 시위로 인해 <맴> 2회 공연과 <표류지> 1회만 공연하고 11월 15일 공연이 중단되었다. 이 무렵 교양학부축제 때 상연하기 위해 이충향(국문72)이 연출을 하고 1학년 조원선(체교73)과 이원재(심리73)가 각각 아버지와 아들 역의 배우로 참여하여 준비했던 기 프와시의 단막희극 <아버지의 연설(Le Discours du Père> 또한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 사학과에서 이승재(임학70) 연출, 변춘애(사학72) 주연으로 15~17일 공연을 예고했던 <배비장전>도 관극평이 이듬해 4월 9일 자 고대신문에 실린 것으로 보아 74년 3월 말 또는 4월 초로 공연이 연기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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