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2018년)

고대극회사 1975 상반기

犬毛 - 개털 2018. 7. 27. 15:17
9. 대학최초의 ‘실험레퍼토리 공연’과 긴급조치7호로 인한 선후배합동공연 무산 (1975 상반기)

1973년 4월 당시 극회회장 장두이(국문70)는 71년 드라마센터에서 유덕형이 처음 시도했던 ‘레퍼토리 시스템’을 대학최초로 시도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한 작품을 일정기간 연습한 다음 2~3일 간 짧은 시일 내에 일회성 공연을 올리고 마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한 달 이상의 일정 기간 동안 매일 또는 주1회의 공연을 갖고, 관객들과 함께 공연상의 문제점들을 검토해가면서 공연의 질을 높여가는 방식으로 대학극의 전문화를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5월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공연을 하겠다했던 이 계획은 당시 바쁜 공연 일정, 극회 핵심멤버들의 대공분실 연행, 열악한 시설환경 등의 문제로 인해 아쉽게도 실현되지는 못했었다.

이 ‘레퍼토리 시스템’은 2년 뒤인 75년 초 김창화 회장 시절 전해 가을 정기공연의 무산을 아쉬워하던 회원들의 중론이 모아지면서 다시 본격 시행된다. 이때 고대극회는 창작극 팀과 번역극 팀으로 나눠 <제1회 실험레퍼토리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75년 2월 26일부터 3월 12일까지 일요일을 제외하고 2주간 매일 번갈아 가며 공연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레퍼토리는 이규상 작 <병원에서>와 해롤드 핀터 작 <방>이었다.
▲ 75년 <실험레퍼토리공연> 기사(고대신문 75.3.4)

2월 26, 28일, 3월 4, 6, 8, 11, 12일에 학생회관 4층 제2회의실에서 정동천(토목72) 연출로 공연한 <병원에서>는 이규상(영문69)이 전해 74년 9월의 고대신문700호 기념 현상모집에 그의 여동생 이영순의 이름으로 응모하여 당선된 단막극 <의사놀이>를 <병원에서>로 제목을 바꾼 것이었다. 어느 정신병원 진찰실에서 의사로 보이는 김정국이 배가 아프다고 찾아온 환자 박달수에게 사형집행실 같은 이곳을 떠나 새 집을 짓자면서 그를 조수로 임명한 다음, 환자인 그들에게 진찰실을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간호원을 제복을 입고 질서를 파괴하며 온갖 횡포를 부린 자라며 수술대에 눕혀 수술을 끝낸 뒤 간호원이 부스스 일어나면서 끝나는 이 희곡은 당시 여석기 교수의 심사평을 빌리면 ‘비정상이라고 통념적으로 생각되는 정신병환자를 의사로 바꿔놓고서 <정상적>인 것이 얼마나 정상일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단막극으로 출연진은 A,B팀으로 나눠 김정국 역에 조원선(체육73), 민봉준(토목74), 박달수 역에 이동희(토공73), 정초영(노문74), 간호원 역에는 이은희(간호72)가 출연했다.
▲ 제1회 실험레퍼토리공연 팸플릿

이러한 재학생 창작극 <병원에서(의사놀이)>를 쓴 이규상(영문69)은 1976년 동아방송 PD로 입사하여 선배 안평선(사학57) 연출로부터 인계받은 라디오 문예드라마 <인생극장>의 <춘자의 사계절(최일남 원작, 정하연 극본)>편을 멋지게 연출함으로써 드라마PD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는데, 안평선이 기획하고 이규상이 연출한 총28화의 <인생극장> 시리즈 중 가장 유명해진 작품은 조용필이 주제가를 불렀던 <창밖의 여자(배명숙 극본)>편이었다. ‘꼼장어’라는 별명을 지닌 자상한 부산 사나이로 70년대 고대극회 후배들에게 신망이 높았던 그는 1980년 4월부터 다시 부활된 실록 다큐멘터리 정치드라마 <정계야화(총38화)>의 연출을 맡는 동안 전두환 군사정권의 심기를 여러 차례 건드리고 80년 말 동아방송 강제통합당시에도 반대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짐에 따라 보안사(현 기무사)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뒤 KBS에서 본업인 PD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청료 징수업무나 행사시 바둑판을 나르는 등의 잡무만 하다가 결국 동아일보 부산지국으로 전보되어 신문보급 및 수금 등의 업무를 하게 된다. 이후 실의에 빠져 계속 술을 많이 마시던 그는 그로 인해 간암이 발병하면서 퇴사한 뒤로 투병생활을 이어가다가 2004년 타계하였다.
▲ 이규상(1974)

역시 <제1회 실험레퍼토리공연>으로 2월 27일, 3월 3, 5, 7, 8, 10, 12일에 학생회관 구내다방에서 김창화(물리72) 연출로 공연한 해롤드 핀터 작, 신정옥 번역의 <방(The Room)>은 어느 집 방에서 끊임없이 말을 이어가는 여인 로즈와 계속 침묵만 지키는 남편 버트의 불통 속에 집주인이 찾아와 혼란스러운 대화를 나누다 돌아가고 버트가 잠깐 나간 사이에 예고 없이 방을 보러온 샌즈 씨 부부가 집에 대해 두서없이 물어보다가 이 집이 곧 비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자 로즈는 두려움을 느끼고, 이후 집주인이 누가 지하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만나 본 흑인 맹인 라일리가 그녀의 죽은 아버지를 언급할 때 남편 버트가 다시 등장하여 자신의 차와 드라이브에 대해 떠들어댄 후 라일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 다음 순간 로즈는 눈이 멀고 만다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폭력적인 정치권력의 위협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고 내면의 벽을 쌓지만 결국 폭력에 무너져 정체성을 잃고 죽음 같은 암흑 속으로 빠져버리고 마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부조리극인데, 이 <방>의 배우로는 로즈 역에 변춘애(사학72), 버트 역에 이찬(건축74), 집주인 키드 씨 역에 최유진(물리70), 라일리 역에 김경일(전기74), 샌즈 씨 역에 박준근(식공74), 샌즈 부인 역에 김충순(생물73)이 출연했다.

이러한 제1회 실험레퍼토리공연 <병원에서>와 <방>의 스탭으로는 기획에 이규상(영문69), 조연출에 성병숙(임학73), 무대감독에 최유진(물리70), 윤홍섭(기계73), 장치에 임봉수(산공74), 소도구에 전완종(공학74), 조명에 강수관(지질74), 조용현(전자74), 효과에 장연숙(가정73), 권석연(교육73), 의상에 박영숙(심리74), 정진형(심리74), 분장에 정동천(토목72), 배현나(심리74), 진행에 이원재(심리73), 이백철(중문74)이 참여했다.

이때 <병원에서>를 연출한 정동천(토목72)은 이후 극회에서 76년 <어딘가에(조원선 작)>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최인훈 작)를 연출하고, 77년 다시 회장이 되어 <안도라(막스 프리시 작)>도 연출하다가, 그해 TBC-TV PD로 입사한 뒤로 TBC <쇼쇼쇼>를 연출하여 80년 방송통폐합 이후에도 83년까지 KBS <쇼쇼쇼>를 연출한다. 그렇게 예능PD로서 첫발을 디딘 그는 KBS-TV에서 음악프로그램 <젊음의 행진>,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 <쇼 비디오 쟈키> 등을 연출하고, <86아시안게임> 및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방송을 연출함으로써 88년 <올림픽 문화장>을 수상한다.
▲ 정동천(1977)
▲ 정동천 연출의 TBC <쇼쇼쇼>
▲ 정동천 연출의 KBS <쇼 비디오 쟈키>

이후 1991년 SBS로 자리를 옮긴 정동천은 음악프로그램 <SBS 인기가요> 및 <스타 서울 스타>, 시트콤 <LA 아리랑> 등을 연출하고, 96년에는 한센병 환자 위문공연 <소록도의 봄>을 연출하여 97년 카톨릭방송대상을 수상한 뒤, 버라이어티 쇼 <기쁜 우리 토요일> 및 <대종상 영화제(’99)>, <세계불꽃축제(2000~04>, <한중일 슈퍼모델 선발대회(2001~06)> 등의 대형특집프로그램을 연출하고, 2003년에는 한일 월드컵 1주년을 기념하는 장예모 감독의 오페라 <투란도트> 제작총감독을 맡기도 하면서 SBS 문화사업팀장, 제작본부 제작위원 등을 역임하다가 2007년 퇴사 후, 2009년부터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임이사(2009~12)로서 경영관리본부장, 부원장, 원장직무대행을 역임한다.

한편 제1회 실험레퍼토리공연에서 <방>을 연출했던 당시 극회회장 김창화(물리72)는 이해 75년 이장호, 하길종, 김호선, 홍파, 이원세, 변인식 등이 소위 ‘유신영화법’에 대항하여 예술영화를 표방한 영화운동집단 <영상시대>의 연출부원으로 입단한 뒤, 75년 12월 <영상시대>의 군부대위문연극 <미스 성의 이야기(이성용 주연)>를 연출하고, 76년 7월 고려대 록밴드 Korea Stones의 의뢰로 창작 록뮤지컬 <공간, 소리, 느낌>을 연출하는가 하면, 79년에는 시극 <새타니(박제천 시, 이언호 각색)> 및 <판각사의 노래(박제천 작, 김창화 각색)>를 연출하기도 하다가, 80년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대학원에 진학 후 그해 한국 독립영화 맹아기의 대표작인 16mm 단편영화 <강의 남쪽(장길수 감독)>에 주연으로 출연하고, 석사졸업 후 82년 극단 신협 100회 기념공연 <도산 안창호(김창화 작)>를 연출한 뒤, 83년 서사극을 추구하는 극단 <한울>을 창단 <당통의 죽음(뷔히너 작)>, <역사의 강(김창화 작)> 등을 연출하다가 예수정(독문73)과 결혼을 하고 함께 독일유학을 떠난다.
▲ 김창화(1975)

그 후 독일 뮌헨대학 연극학 박사이자 독일 셰익스피어학회 회원이 된 그는 1991년 귀국하여 92년 6월 극단 가교에서 <트로이의 여인들(에우리피데스 작)>을 번안, 연출한 뒤, 그해 10월 연극이론과 무대현장의 접목을 위한 연극평론가들의 모임을 제안하여 당시 국내 및 해외에서 문학 및 연극학을 전공한 오세곤, 이재명, 김형기, 이혜경, 서명수, 박철완, 박해란, 이상란 등의 젊은 연극학자들과 함께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약칭 공이모)>을 창설, 초대대표(’92~94)를 맡으며, 11월에는 국립극단에서 셰익스피어극 <법에는 법으로>를 직접 번역하여 국내 초연한다.

이후 1995년 상명대학교 연극학과 초대학과장이 되는 그는 그해 극단 <즐거운 사람들>의 <여자의 적들(조광화 작)>을 연출하고, 아이스킬로스의 희랍비극 3부작 <아가멤논>,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제물>, <복수의 여신들>을 한데 묶은 <오레스테스>를 번역 출간하는가 하면, 98년에는 심현우, 최유진으로 이어내려오던 극단 <독립극장(전 시민극장)>의 대표(’98~01)를 맡으면서, <메카로 가는 길(’98 박철완 연출, 전경자, 예수정, 이현우 출연)>, 자신이 번역했던 <오레스테스 3부작(’99 손선호 연출, 예수정, 강신구, 주진모, 이현우, 이연규 등 출연)>, <황순원의 소나기 그리고 그 이후(’01 류근혜 연출)>를 제작하기도 한다.
▶ 김창화 번역, 제작의 <오레스테스 3부작> 포스터

그리고 상명대 교수로서 <한국비교연극학회> 회장(’98~2000), <한국고전희곡학회(현 공연문화학회)> 이사(’01~10), <공연문화산업연구소> 상임이사(01~16년), 상명대 예술대학장(’06~08년), <한국교육연극학회> 회장(‘08~12), <해롤드 핀터 페스티벌> 집행위원장(’09~10) 등을 역임해오던 그는 2018년 상명대학교를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국제극예술협회(I.T.I.)한국본부> 부회장(’12~ )으로 활동 중이다. 그의 주요논문 및 저서로는 < J. M. R. Lenz 의 사실주의 극작술 연구(’91)>, <교육연극의 활용방안에 관한 연구 (’97년)>, <극작술 연구 방법론 (’98)>, <한국에서의 독일 연극과 브레히트 수용(’98)>, <동시대 연극의 새로운 이해(’98)>, <한국에서의 서양연극(’99)>, <독일 자연주의 연극(’01)>, <청소년을 위한 연극교육(’03)>, <예술교육 인지론(’05)>, <한국 셰익스피어 공연의 연기양식에 관한 문제(’07)>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오레스테스>이외에도 <헨리크 입센 희곡선집 – 인형의집, 유령(’10)>, 막스 프리쉬의 <중국의 장벽(’14)>, 브레히트의 <빵집(’15)>, <바알(’16)> 등이 있다.

75년 2월 말, 3월 초의 <실험레퍼토리공연> 이후 고대극회(회장 김창화)는 개교70주년을 맞아 10년 주기의 선후배합동공연을 준비한다. 이때 선정된 작품은 <오이디푸스>였고, 연출은 김경옥(영문46) 선배가 맡기로 했으나, 3월 31일 1,500여명의 고대생들이 ‘독재정권퇴진, 유신헌법철폐, 학원 및 언론탄압 중지, 고문정치종식, 구속학생 석방’ 등을 외치며 교문 밖 시위를 시도하고, 4월 7일에는 2,000여명이 정상수업을 마친 후 교문 밖 진출을 시도,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대치하다가 철야농성에 들어가자, 4월 8일 대통령 박정희는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하는 전무후무한 긴급조치 제7호를 발동하여 휴교령을 내리고 수경사 병력이 학교를 점령함으로써 이해의 선후배합동공연은 결국 무산되고 만다. 긴급조치7호의 내용은 • 고려대학교 안에서의 일체의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 필요한 경우 병력을 동원하여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며 • 위반자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 75년 4월 긴급조치7호로 휴교중인 고려대학교 정문 앞 광경

이 시기 고대극회원 박준근(식공74) 등의 학생들은 교문 밖 거리시위의 선봉에 나섰다가 후속대열 차단으로 고립됨으로써 성북경찰서로 끌려갔고, 4월 14일에는 7, 8일 시위의 주동자로 조성우(행정68), 김성곤(사학72), 설훈(사학74),  문학진(사학74), 최규엽(독문74) 등 32명이 제적 조치되연서, <도산연구회>, <민족이념연구회>, <한국민속문화연구회>, <중국문화연구회>, <민사법학회>, <카톨릭학생회>, <불교학생회>, <원리연구회> 등 12개 써클이 해체 당하게 되자, 김상협 총장은 항의의 표시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면서 사표를 내고 18일 차락훈 교수가 총장서리로 임명된다. 5월 10일에는 추가로 9명의 학생들이 더 제적되면서, 박준근 등 7명의 학생들이 무기정학을 당하고 군입대 조치된다. 이렇게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긴급조치7호는 5월 13일 긴급조치8호로 해제되지만 동시에 발동된 긴급조치9호로 유신철권통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6월 19일 차락훈 총장이 취임하고, 총학생회가 해체되면서 6월 31일 학도호국단이 출범하게 된다. 이 시기인 6월 문과대학에서 처음 주최한 제1회 <녹두문학상> 소설부문에 고대극회원 안희옥(국문72)의 소설 <세번째 가을>이 공동수상작으로 선정되지만 학내시위를 소재로 했다는 이유로 검열에 걸려 작품이 발표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한편 이해 5월 27일에는 극회동우 이제창(원예67)이 극단 <에저또> 단원으로서 방태수 대표와 함께 서울 중구 저동의 2층 가정집을 개조하여 5개월여 동안 심혈을 기울이고, 그를 도와 최유진(물리70), 유해무 등 <고대극회> 회원들 및 <프라이에 뷔네> 단원들이 곡괭이로 무대를 만들 땅을 파는 등 일손을 거들기도 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소극장 <에저또소극장(훗날 삼일로 창고극장)>이 개관식을 갖고 첫 개관기념공연으로 5월 28일부터 6월 5일까지 이제창 연출의 시극 <새타니(박제천, 이언호 합작)>를 공연한다.
▲ <삼일로창고극장>과 첫 개관공연 <새타니> 초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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