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비인간적 시대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제2회 실험레퍼토리공연 <어딘가에>와 <꿈> (1976 초봄)
75년 11월 정기공연 <유령> 팸플릿을 통해, 고대극회(회장 최유진)는 75년 봄 때와 마찬가지로 창작극과 번역극 한 편씩 2편의 단막극을 공연하는 <제2회 실험레퍼토리공연>을 76년 3월에 상연하겠다고 예고했다. 이때 예고한 번역극은 귄터 아이히 작, 황근(독문72) 번역의 <꿈>이었으며, 창작극은 12월 31일까지 접수를 받겠다고 공모했다. 이 공연의 기획은 공연 팸플릿에 기획실이라고 명명한 최유진, 김창화, 조원선, 황근, 정동천, 이찬 5명이 기획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독일의 시인 귄터 아이히가 1950년에 써서 51년에 방송극으로 발표하고 59년에 수정한 <꿈(Träume)>은 2차 대전이후의 비극적 세계 인식 속에서 휴머니즘의 회복을 추구한 시적인 작품으로 이때의 고대극회 공연이 한국에서는 초연이었다. 이 작품은 인류의 경험이라는 뜻으로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5개 대륙의 다섯 가지 악몽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그 중 번역자 황근이 선별한 두 가지 이야기는 아시아 중국의 한 젊은 부부가 몸보신을 위해 아이의 피와 간을 먹으려는 부잣집에 아이를 팔러가서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가격을 흥정하다가 아이를 파는 이야기와 유럽 독일에서 군화 발소리를 듣고 집에서 뛰쳐나와 오랫동안 네모 난 기차화물차량 안에서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사는 사람들이 거기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는데도 두려움 때문에 그 빛을 막아버린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단막극 <꿈>은 이찬(건축74)이 연출을 맡았고, 첫 번째 중국 꿈에서는 남편 역에 임병춘(수학75), 아내 역에 배현나(심리74), 아이 역에 김형범(지질75), 부잣집 주인 역에 김완석(심리75), 부잣집 부인 역에 정진형(심리74)이 출연하고, 두 번째 독일 꿈에서는 남편 역에 임병춘(수학75), 아내 역에 김정자(원예75), 이웃집 여자 역에 김영오(원예75)가 출연하여, 3월 19, 20, 23, 27, 30일 학생회관 구내식당에서 상연하였다.
▲ <꿈> 연습장면
▲ 제2회 실험레퍼토리공연 팸플릿 표지
제2회 실험레퍼토리공연으로 같은 시기 상연된 창작극으로는 최종적으로 극회원 조원선(체교73)이 쓴 <어딘가에>가 선정되었다. 그동안 이규상(영문69)의 창작극에 밀려 작품발표 기회를 갖지 못했던 그가 드디어 자신의 희곡을 상연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어딘가에>는 A라는 사내가 있는 방에 B라는 사내가 자루 속에 넣어진 채 배달돼오면서 두 사람 간에 대화가 시작되는데, B는 끊임없이 왜 자신이 여기에 오게 됐는지를 묻고, A는 자신도 자루에서 나와 여기 있으니까 그냥 여기 있어야한다는 억지주장만 되풀이하면서 둘이서 어딘가에 있을 이상향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 C라는 새로운 사내가 또 다시 배달돼오면서 극이 끝난다. 이 이야기는 조원선 자신이 1학년 때 영문도 모르고 경찰서 취조실로 끌려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유신독재 시대 국민들이 방향도 모르고 위정자가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면서 무조건 순응해야만 했던 상황을 암시적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심오한 존재론적 담론을 담아 풀어냈고, 또 그런 상황을 코믹하게 연출하고 연기해냈기 때문에 다행히 당국의 검열에는 걸리지 않았다.
이 <어딘가에>는 정동천(토목72)이 연출을 맡고, 전년도 제1회 실험레퍼토리공연 <병원에서(병원놀이)>에서 코믹연기로 콤비를 맞춘 바 있었던 이동희(토목73), 조원선(체교73), 김경일(전기74)이 A, B, C 역으로 출연하여 3월 20, 24, 26, 27, 31일에 학생회관 제2회의실에서 5차례 상연했다. 이러한 제2회 실험레퍼토리공연에 대해 경영학과 학생 이윤호(훗날 지식경제부 장관)는 <고대신문>에 기고한 관극평에서 <어딘가에>는 “무대 위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점에서 공감을 느꼈다”고 평했고, <꿈>은 기계문명과 경제적 메커니즘에 휩쓸려 기계화, 수단화되어가는 현대 인간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전체적으로 호평하면서도, 연출적인 측면에서 식모가 아이의 피를 부엌에서 가져오는 장면을 강조하는 등 관객에게 지나친 공포감을 줌으로써 작품이 관객에게 전하려 했던 바를 중점적으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점을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이 공연 때 3월 입학식 이전에 이미 극회에 들어온 76학번 신입생 이성용, 주진모, 김기하, 김교찬, 유대준은 이 공연을 준비하고 공연하는 데 무대 뒤에서 많은 조력을 했었는데, 이들은 그들보다 늦게 들어온 76학번 동기들에게 마치 선배처럼 행동함으로써 장영린, 승서영, 김광겸, 김명희, 박경애, 김영애 등의 76학번들은 한동안 그들에게 존댓말을 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