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털네 집

제주 민박 솜털네집 - 산이 태어난지 1년, 그날에 가다.

犬毛 - 개털 2016. 11. 19. 19:46

제주 민박 솜털네집 - 산이 태어난지 1년, 그날에 가다.


나는  살아가면서 내 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하지 않은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임종을 지키는 것을 오히려 좋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저 아름다운 일, 기쁜 일, 행복한 일

이런것만 보고 살았으면 하는 얕은 소망이 있었다.


제주에 내려온지 1년도 안돼, 21년 키우던 맥이 나의 품에서 꺼어이 꺼어이 울더니

그밤 하늘나라로 갔다.

그의 죽음은 내 가슴속을 후벼 파 , 눈물로 오랜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시간이란 게 뭔가?

금새 같이 갈것같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내게도 시간이라는 무서운 단어앞에 조금씩 무디어 갔다.

그래도 그를 쉽게(?) 잊을수 있었던건, 여름에 드실려고 키우던 몽이와 둥이를 입양해 정을 준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몽이는 진돗개로 젖 뗀지 얼마되지 않은 , 부모의 정을 알기도 전

올레 1코스, 산속에서 밭을 해치는 짐승을 보면 짖으라고 인적이 드문 곳에 매여있던 아이였다.

어린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짖지도 못하고 입을 닫아 버린 아이.

동네노인은 짖지 않는 아이를 산속에서 데리고 나와 ,창고 뒤켠에 묶어두고 똥도 치우지 않은채 빗물을 먹게하면서

이틀에 한 번 적당히 밥을 주며 여름 복날 잡아먹기로 작정하고 날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제주에 집을 짓기로 하고 1년 년세를 얻어 살던 우리눈에, 이 불쌍한 개가 눈에 들어왔다.

21년 기른 개 맥이 너무 늙어 새집 지을 때까지 딸애에게 맡기고 내려온 우리.

몇 번 생선에 비벼 밥을 주곤 했지만,  전혀 틈을 주지 않던 그 개를 춥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눈에 어른거려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며칠 고심한 끝에, 노인을 찾아가 개를 사겠다고 제안 했다.

노인은 개인적으로 보면 나쁜사람은 아니었다.

1년에 2마리씩 개를 잡아먹는데, 그래서인지 기골이 장대했다.

울며 애걸하는 내게 기꺼히 승낙해 주셨고, 덤으로 개집까지 주셨다.

그 날 , 2014년 12월 31일 .

눈보라가 치던 날 , 우리는 그 곳,  그 감옥에서 개를 출옥 시켰다.

두려움에 떨던 개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나가면 죽는다는걸 알고 있는 듯이, 네 발을 밧데루를 하듯 버티고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사납거나 물지를 않아, 우리부부는 둘이서 들어안고 그곳에서 끌고 나왔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꿈을 가지라는 의미로 몽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그날 이후 몽이는 우리 가족이 되었다.

여느 사람의 눈에는 하찮은 , 너무도 평범한 몽이. 그러나 사랑을 먹고 자란 몽이가 이렇게 달라졌다.

귀도 쫑끗서고, 꼬리도 360도 감겨진 멋진 몽이가 되었다.

외로웠던 몽이에게 뒷집 뱃 사내들이 키우던 여자친구 흰둥이가 생겼다.

아마도 출생시기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비슷한 또래.

흰둥이는 주인에게 자주 얻어맞았고, 배 타러 한번 나가면 4~5일은 혼자 지냈다.

사료를 밥그릇 가득 넣어두면 , 비가 오면 퉁퉁 불었고, 개미며, 바퀴들이 버글버글 거렸다.

주인이 집에 있을 때도 뱃사람 몇몇이 모여 며칠 밤 고스톱을 치곤 했다.

우리가 개를 좋아한다는 걸 안 후, 둥이를 때리는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머리에 핏자국과

얼굴이 부어있는 걸 종종 발견했다.

난 먹을 것이 생기면 이웃 뱃놈(?)에게 가져다 주고, 넘치는(?) 인정을 베풀었다. 작전이다.


그러던 어느날, 뱃사람는 같이 배타는 사람들이 희둥이를 잡아먹겠겠다고 날을 잡자는데

키우고 싶으면 데려가라 했다.

우리는 그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치의 망서림도 없이 희둥이를 데려왔다.

이 여리디 여린 흰둥이를 그들은 무슨 자격으로 학대하고 죽이려는 걸까?

우리는 몽이와 흰둥이가 서로 힘을 함쳐 어떤일이 생겨도 잘 헤쳐나가라는 의미로 몽둥이 부부를 만들었다.


한 달 후, 제주에서의 우리 새집이 완공된 날. 2015년 7월 31일

몽이와 둥이는 산에 난향이 가득한 동네 - 난산리로 이주를 했다. 

그들도 새집이 좋았을까?

8월1일 드디어 몽이와 둥이가 합방하여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2달 뒤 2015년 10월 1일.

둥이는 밤새 산고의 진통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전날 이불도 까아주고 준비는 해 줬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4마리의 아기들이 세상에 나와 있었다.

금,수,강,산.

네마리 다 수컷.

아름다운 세상에서 마음껏 삶을 누려라.


새벽 4시면 미역국 끓여다주기를 시작으로 하루 5번의 식사가 산모에게 제공되기  2달.

둥이만 먹을것을 많이 잘 주면 몽이가 섭섭해할 것 같아, 둥이의 1/2 정도씩 아빠 몽이에게도 제공되었다.

개만도 못한 놈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

몽이는 절대 먼저 먹지 않았다.

둥이가 다 먹고 난 후에야 밥그릇에 입을 대는 몽이.

나는 개들을 키우면서 많은 것을 그들에게서 배웠다.

적어도 개같은 놈은 되어야지.


21년 키운 맥은 딸아이가 고1 때,  12월 1일 길에서 유기견을 데리고 왔다.

딸아이는 맥을 엄청 사랑했고, 아직 맥이 떠난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 맥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모둥이를 키우면서 우리는 어느정도 맥을 잊으려 했었고 결국 맥이 노환으로 위독하다하여 딸애가 서울에서 급히 제주로 

데려왔고 맥은 내품에서 이틀밤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새집 입주하기 한 달 전이다.

남편은 맥을 새집 담 아래 내가 부엌에서 항상 내다 볼수 있는 자리에 묻었고,

그리고 우리의 가슴 속에 또 묻었다.


맥을 묻고 서울로 올라간 그날, 딸아이가 울면서 전화했다.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 소리내어 울기만 했다.

한참 후, 목소리를 가라앉히고고, 딸아이는 낮게 말했다.

"엄마, 나 임신했어. 맥이 우리에게 아기를 주고 갔나 봐! .... 이제 날 잊고 아기를 잘 키우라고...."


결혼한지 5년만에 임신한 딸아이.

딸아이가 금,수,강,산을  보러 내려왔다.

아마도 몽둥이의 새끼들을 보면 마음에 힐링이 될것같다고...

그리고는 막무간에 둘째 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수는 서울로 분양된 것이다.

말 못하는 어미 둥이는 마음이 어떨까?


이제 남은 금, 강, 산이는 우리의 몫이다.

좋은 집으로 보내야 할텐데...

금, 강, 산

셋 중에 막내 산이는 힘센 형들에게 치여 가장 에미젖을 못 얻어먹은 찌질이.

난 그 찌질이가 불쌍해 제일 오랫동안 에미곁에 두기로 했고,

금이와 강이를 동네안에서 가까이 분양을 했다.

내깐에는 주인을 고른다고 했는데, 몽둥이 아침 운동을 시키다 금이와 강이가 살고있는 집을 들르면

그들은 엄청 반가워했고, 돌아설 때쯤이면 목을 놓아 울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마음이 아프지만, 사람들은 그걸 팔자라고 한다.


금이는 그런대로 행복해 보였지만 강이는 진짜 개같이 살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 손에서 떠난 아이들.

다시는 새끼를 갖게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산이의 분양. 우리 동네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세화리.

산이를 데려다주고 오던 날,

산이도 자신의 앞날을 알기라도 하듯, 차안에서 구토를 하고 괴로워했다.

산아! 어떡하니? 나도 마음이 아픈 걸...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 들어오는 건축업자 집에서, 산이는 목에 줄 매여 혼자 얼마나 외로울까?

나는 남편이 알고있는 그 건축업자가 싫었다.

그렇다고 개를 세마리나 기를 수는 없었다

개들 덕분에 우리부부는 같이 서울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 좋아하던 해외여행도 못 다닌다.

한 번은 동네 할머니가 자신이 키우던 개를 , 본인이 늙어서 개를 관리할 수 없다고 ,

우리집에 데리고 왔었다.

우리는 더이상 개를 키우지 못한다고 하니까, 셋 키우나, 넷 키우나 그게그거 아니냐고 하셨다........후 후 후.


산이를 보내놓고 세화장을 핑계로 산이를 보러갔다.

보낸 지 일주가 됬는데, 똥 속의 산이. 똥도 한번도 치우지 않고, 개장도 없고...

억장이 무너졌다.

깨끗이 치워주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고, 산이도 괴성을 지르고 울었다.


산다는 것?

사람이나 짐승이나 얼마나 더 아파야 하는걸까?


다음날 개장을 가지고 가서 다시 산이와 상봉.

또 똥 치우고, 물 새로 받아주고.....

그리고 헤어졌다.

산이야  미안해!


다음 장날

산이를 보러갔다가 두말않고 주인이 보는 앞에서 산이를 안고 돌아섰다. 똥밭에 줄도 엉켜있는 불쌍한 산이.

개를 키울 자격이 없는 사람은 제발 키우지 마셔요 - 나는 속으로 외쳤다.

이제 산아!  다시는 너를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께

네 엄마, 아빠 몽둥이 옆에서 무럭무럭 자라라.




산이는 정말 행복했다. 어미 아비에게 애교를 부리며 실컷 뛰놀며.

그러나 산이가 엄마, 아빠 곁에서 보냈던 행복은 8개월 정도.



그렇게 잘먹던 뛰놀던 아이가 사흘을 먹지 않는다.

병원에 데려가니 진드기병 감염이 의심된다고...

채혈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려면 일주일이 걸린댄다.

의사의 동의를 구하고, 채혈한 피을 가지고 직접 동물연구소로 가져가 그날로 검사결과를 통보 받았다.

진드기병 감염이란다.


사실 아침마다 몽이, 둥이, 산이는 한시간씩 산책을 나간다.

동네어귀에서 멀어져 목줄을 풀어주면 셋은 길길이 날뛰고 저마다의 행복을 만끽한다.

난 동물도 자유를 느껴야 한다는 주의고 , 그래서 세마리를 한꺼번에 풀어주면 이건 장난이 아니다. 자유!

아침산책 이후에는 한마리씩 로테이션으로 풀어주고 산이는 밤에는 항상 풀어 놨었다.

물론 산책 다녀오면 진드기약도 뿌려주고, 산책나가기 전에도, 인터넷에서 계피에 소주를 넣어 발효시킨 예방약도 만들어 뿌려주곤

했는데, 잔디위에서 잘노는 산이.

밤새 풀어줘서 잘 돌아다니는 어린 산이에게 진드기는 치명타였나 보다.

의사는 1대 5만원하는 주사를 놔줬고, 부작용이 있을수 있다고 했다.

부작용증세는 한 방향으로 계속 돌거나, 경련을 일으킨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틀 , 사흘 , 비타민 주사를 투약하고 링거를 맞히고...

2~3일사이에 증세는 현격하게 나빠졌다. 일주일을  못 먹고 주사로 연명.

일어나지도 못하고...

9월30일 저녁 산이를 헌관으로 데리고 왔다.

아마도 오늘 저녁 이 고비인 것 같아서...


밤새 한잠을 못잤다.

산이는 아파서 밤 내내 괴성을 질러댔고, 적어도 그의 옆에 있어주는 것이 그의 대한 예의일 것 같았다.


아~

그래서 사람들은 가는 그 순간까지 누구와 같이 있으려 하는구나.

아침 7시쯤 산이는 고개도 채 가누지도 못하면서 여기저기 부딪쳐가며 한 방향으로 발버둥치며 돌고 있었다.

남편은 더이상 볼 수가 없다고 안락사를 시키자고 나를 달랬고, 난 그런 말 하지말라고 소리치며 엉엉 울었다.

그러기를  3~4시간. 아 아 도저히.

여보!

우리 산이 보내주자.

산아! 너무 고생시켜 미안해.

병원으로 이송해서 의사와 상의하고 결국 산이는 그렇게 떠났다.


오늘 10월1일.

산이의 첫 생일.

그 짧은 생을 마지막으로 자기생일날 산이는 우리곁을 떠났다.




나는 이글을 쓰면서 산이를 기억하고 싶다.

눈물로 컴퓨터 자판이 범벅이 되기를 여러번.


산이를 하늘나라로 보낸 후 한 번도 몽이와 둥이를 풀어주지 않았다.

산책을 시킬때도 목줄을 하고 같이 뛰었고, 다녀와선 앉아서 미안하다고 - 이게 너희를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이제는

남은 몽이와 둥이를 마음껏 사랑하면서, 맥처럼 20년을 함께하리라 다짐해 본다.



개털아내 솜털 씀.               2016.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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