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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가차(假借)한 알레고리의 시학(詩學)-견모/조원선의 시 엿보기-//카프카 이만섭

犬毛 - 개털 2007. 5. 2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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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가차(假借)한 알레고리의 시학(詩學)/카프카 이만섭



-견모 조원선의 시 엿보기-



문학에 있어서 리얼리티는 비단 시 뿐만이 아니라 어느 장르에서도 가교의 문제다.

그것이 아무리 깊은 내면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사실성에서 결함을 보인다면

문학성 이전에 독자의 이해를 구하는데 한 장애요인이 될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성의 문제는 그만큼 호흡의 대상이 되기도 하다.

시의 특징 중에 정적인 것이 다른 장르에 비해서 보편적인 점이라 하겠으나

표현기법에 있어 자유자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산문시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양상이다.

그렇기에 통상의 은유조차도 모색의 언어이기에 앞서 형태성을 지닌 꾸밈말로서

환경을 지니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는 평서체의 문장을 도와 의미를 축조하는 산문시가 지닌 독특한 향배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견모 조원선씨의 시는 언어를 가차한 알레고리의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은유를 통한 사유로서 시의 의미를 지핀다.

우리의 삶 속에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수많은 사건들이 실타래처럼 얼키고 설켜 있다.

이처럼 일상 속에 뿌리 내려 뻗어 있는 이 산재한 것들은 그 무엇이라도

그의 언어 속에 유입될 때 그만의 독특한 메타포로 환생한다.

곧 시인은 언어의 시나리오화를 통하여 생물의 언어를 쓴다.

따라서 그의 시는 사물의 이미지를 객관화 시킨 뒤에 리얼리티를 바탕하여

끈끈하고 생경한 모습으로 독창적인 시세계를 그린다고 하겠다.


1.

아 오월이라니까 오월!

오월 몰라? 오월 말이야 오월!

오월이 눈에 안 보이냐?

오월의 냄새도 못 맡는단 말이냐?

근로자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선생님날 민주화운동날 성년날 부부날 부처님날

모두 파랗게 초록 융단 얼씨구 좋다 어깨동무 휘돌아가는 오월이라니까 그러네.

허 허 허

누가 이건 싱그러운 구역질이라 하더군.


구역질 - 부분-


더없이 화창하고 거리낌 없는 푸른 오월, 햇살 고운 이 오월에 대체 무엇을 보라는 것일까,


그의 시적 관점은 시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시인의 언어는 반항이 곧 애정이며 애정이 곧 반항이기도 하다.

그릇된 것을 그릇되었다고 주창하는 것조차 버거운 형식주의가 만연한 삶의 단층에서

소위 폐해가 되고 있는 형식주의를 들추고 싶은 숫기 있는 양심이다.

그 감춰진 것들은 생각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허다하게 병들어 있을 것이다.

이런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의식은 내심 한번은 그릇된 것의 무력화를 꾀해 왔을 것이다.

사회가 지은 수많은 당착을, 아니 우리가 짓고 있는 당착을 시인은 번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로서 보일 수 있는 초극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의 시는 이처럼 산문화를 꾀하면서 탄력 있는 문체로 리얼리티를 그리고 있다.

곧 물음이 대답이 되고 또한 제시어가 된다.


2.

어느 날 저녁

이미 거나하게 취하신 아버지

어젯밤 꿈에 네 할아버지가 “나 돈 좀 주렴”하시더구나 차 몰고 어서 오거라

그 밤을 달려

내 아버지가 당신의 아버지 상석아래 꼬깃꼬깃 돈 넣어드리는 걸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지만

내 아버지의 눈물이 적신 건

바로 내 가슴이었다

까끌까끌했던 아버지의 턱수염이 하얗게 시들어져감이 서러웠었다.

 

이 시대의 아버지는 없다 -부분-


가장 잠재적인 인생의 좌표인 아버지는 늘 우리의 마음을 버티어 준 기둥이었다.

철이 들었을 때나 지금이나, 그것은 이제 더 이상은 아닐지라도 저 먼 유년으로부터 형성해온

아버지의 모습은 닮고 싶든 그렇지 않든 화자에게도 그림자처럼 그늘을 달고

곁에 서 있기에 슬픔이 되고있는 것이다.

어릴 때 아버지의 손 잡고 집을 나섰다가 어두운 밤길을 걸어 올 때 따뜻한 등에 업혀 왔던 기억,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인가 삶의 이고 진 짐의 허기에 치쳐 터벅이며 당신만의 밤길을 돌아오실 제,

등불 붙들고 등 넘어 마중 가던 자식의 마음이 아니였던가,

어쩌면 아버지 또한 그 옛날 할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나 돈 좀 주렴" 이 한 마디 만으로

그늘이 빛으로 오는 쓸쓸한 언어는 아버지의 고단함을 대면하는 정서다.

이 시대의 아버지는 무엇인가. 자식을 화친으로만 성장시키는 우리의 주변을 분명 한번 쯤 돌아보게 한다.

가슴을 주지못하고 눈물 흘리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한다면

과연 근엄한 아버지의 모습일 수 있을 것인가.

상석 아래 꼬깃거리며 넣어드리는 돈의 슬픔이 화자의 슬픔이 되고 있다 할 것이다.


3.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거기 저 조趙시인詩人 계시오?

앗다 시인詩人은 무슨 말라비틀어져 빌어먹을

히 히 히 히

무슨 꼬랑지 긴 고양이가 처먹고 똥으로 싸 놓은 걸 뒤져 어쩌고저쩌고

젤로 비싸다는 그 커피란 놈이 나를 웃기더니만

히 히 히 히

여기 미친 개 한 마리 뿐 이외다했더니

아 형님 나 김金시인詩人이라니까요 한다

히 히 히 히

에 라 이놈아 너나 실컷 그 잘난 시인詩人해라

요새 배때기에 기름 좀 낀 모양이구나

히 히 히 히

슬슬 여름 다가온다고 늙은 똥개 털 끄슬렸나 안 끄슬렸나 문안이냐

나 이리 혼자 지랄하다 자빠진 다음에나 조趙시인屍人이라 불러라

히 히 히 히

이놈의 웃음 언제나 멈추려나

히 히 히 히.

 

요절복통 -전문 -


대화체를 빌러 쓴 이 시는 화자가 형식의 속박으로부터 의연하려는 모습을 잘 보이고 있다.

인식이 강요하는 세태에 대하여 우리는 언제 부정해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초연해 본 적이 있었던가.

겉치레 꾸미기에 눈 밝은 일상의 모습은 거울조차도 오히려 형상을 부채질 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런 비속적인 웃음에 익숙해졌을까.

진정으로 웃을 수 있는 일이 아니면 그것은 희극이 아니다. 웃음을 빙자한 이모우션일 따름이다.


위 세 편의 근작을 통해서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이데아가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조원선씨의 시는 곧, 부정을 통하여 긍정을 이끌어내는 언어의 모노그라피다. 혹은 그 반대이다.

이성이 간과하는 협착적인 것을 해학, 과장. 너스레. 등등으로 언어마당에 불러놓고 벌이는 굿판의

시다. 이 신내림의 굿은 머지않아 시퍼런 칼날을 세운 작두를 타고 예언의 언어로

병든 우리의 삶에 씻김굿의 맛을 더욱 리얼하게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