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조씨(楊州趙氏)
[유래]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때 호장,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그러나 양주조씨족보 경신보(1980년)에는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됐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병신보(1956년) 서문에는 고려시대의 양주호장 조통(趙通)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연대가 오래되고 문헌상 기록이 미흡해 대수(代數)를 밝힐 수 없으므로,
조잠(趙岑)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양주로 하고 있다.
-시조의 묘는 전해지지 않는다. 음력 10월 14일 향사한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 대제학을 지낸 조말생(趙末生)을 비롯하여 이조판서를 지낸 조극관(趙克寬),
관찰사를 지낸 조수양(趙遂良), 공조판서를 역임한 조언수(趙彦秀), 좌삼찬(左參贊)의
조사수(趙士秀) 등 많은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가문의 기틀을 세웠다. 선조 때에
조정(趙挺)이 우의정에 오르고 조존성(趙存性)이 호조판서를 지내면서부터 가문은
더욱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조창원(趙昌遠)은 진사시에 합격, 의금부도사를 거쳐 인천부사를 지낼 때 딸이 인조의
계비(繼妃)가 되자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지고 돈녕부사(敦寧府事)가 되었다.
조계원(趙啓遠)은 1628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조사석(趙師錫)은 1688년 좌의정, 조태채(趙泰采)는 1717년 우의정을 지냈다.
조태구는 16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고,
조태억(趙泰億)은 170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그리고 순조 때의 조두순(趙斗淳)은 182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삼정 개혁을 단행, 1865년 영의정에 올라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켰다.
철종 때의 조병세(趙秉世)는 185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그는 1896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의해 시무19조를 상소하였고,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못하자 자결하였다.
그에게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계 파]
시조 조잠의 증손대(조선 전기)에서 4개파로 나뉘었다. 그러나 정평공파와 제학공파는
1453년(단종 1년)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김종서(金宗瑞) 일파로 몰려 멸문을
당함으로써 현재 그 후손이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전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문강공파의 후손이며 조말생은 사실상 중시조가 된다고
한다.
-정평공파(靖平公派) : 파조는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조계생(趙啓生)이다.
-강화공파(江華公派) : 파조는 강화부사를 지낸 조유중(趙惟中)이다.
-문강공파(文剛公派) : 파조는 조말생(趙末生)이다.
-제학공파(提學公派) : 파조는 보문각제학을 지낸 조종생(趙從生)이다.
[집성촌]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묵안리
-전북 김제군 청하면 관상리
[족보발간]
-신축보 : 1721년(경종 1년)
-계해보 : 1743년(영조 19년)
-을유보 : 1825년(순조 25년)
-병신보 : 1956년
-경신보 : 1980년
[본관지]
-경기도 양주군
[기 타]
[ 연락처 ] 02-980-1332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3,221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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