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자료

슬프다 손기정! - 펌 글 -

犬毛 - 개털 2013. 8. 17. 11:54

내일 베를린 올림픽 제패 기념일
나라 잃은 마음에 우승 기쁨 잃어
지인에게 보낸 엽서엔 세 글자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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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시비, 역사 교과서 왜곡, 일본의 개헌과 군사대국화 시도, 위안부 망언, 야스쿠니 신사 참배…. 1945년 일제 식민지 지배에서 광복을 맞은 지 68년이 흘렀지만 한·일 관계는 여전히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고 있다. 동아시아의 우의를 다지는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한·일전에서는 일본 관중이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흔들고, 붉은악마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구가 담긴 플래카드로 맞서며 서로를 자극했다.

 스포츠에서 한·일 양국의 불행했던 과거를 대표하는 인물이 있다.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이다. 1936년 8월 9일, 섭씨 3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한국 마라톤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다. 9일은 손기정이 2시간29분19초로 올림픽 기록을 세우며 월계관을 쓴 지 77년이 되는 날이다.

 손기정은 시상식에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우승 기념 묘목(대왕참나무)을 받았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3위로 동메달을 목에 건 남승룡이 “손기정이 1등을 한 것보다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묘목을 갖고 있다는 게 부러웠다”고 했던 바로 그 묘목이다.

손기정이 가슴에 안고 일장기를 가렸던 30cm 남짓의 묘목은 나이테 77개를 제 몸 안에 새기며 둘레 3m, 높이 17m로 우뚝 자라났다. 그 나무는 지금도 ‘서울 중구 만리동 손기정로 101’ 손기정 체육공원에서 77년 전 그날처럼 뜨거운 태양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누리고도 마음껏 웃을 수 없었던 비운의 사내 손기정. 그가 2002년 향년 90세로 유명을 달리한 지 11년이 흘렀다. 2000년대 이후 출생한 아이들에게 손기정은 점점 낯선 이름이 돼가고 있지만 그가 남긴 정신과 흔적은 손기정 체육공원에 오롯이 살아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을 빠져나와 허름한 골목길을 헤집고 올라가면,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에 둘러싸인 만리동 언덕배기에 손기정 체육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손기정의 모교 양정고가 있던 자리다. 1988년 양정고의 목동 이전에 맞춰 손기정 체육공원으로 재탄생했고, 지난해 손기정기념관이 들어섰다.

 기념관에는 손기정의 일생이 압축돼 있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압록강 철교 위를 달렸던 어린 시절, 나라를 빼앗겨 올림픽 첫 우승의 기쁨마저 빼앗겼던 젊은 날,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주자로 나섰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황영조의 몬주익 신화에 함께 감격했던 노년기의 이야기가 정리돼 있다.

 한국인으로 사상 처음 올림픽 우승을 하고도 패잔병처럼 고개를 숙이고 울상 짓는 손기정의 표정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살아있는 역사 교육이다. ‘슬푸다’라는 단 세 글자만을 적어 베를린에서 한국의 지인에게 보낸 손기정의 엽서는 당시 그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승을 한 뒤 일본 선수단이 마련한 축승회 대신 베를린에 거주하는 안봉근(안중근의 사촌형제)씨의 집으로 가 난생 처음 태극기를 보고 전율했다는 사연도 있다. 베를린 올림픽을 마치고 여의도 공항으로 귀국한 직후 경찰에게 죄수처럼 끌려가는 사진도 인상적이다.

 기념관을 둘러보면 베를린에서 손기정이 42.195km를 어떤 마음가짐과 전략으로 뛰었는지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손기정에게 오버페이스하지 말라고 조언하며 반환점까지 나란히 뛴 영국 마라토너 어네스트 하퍼, 40㎞ 지점에서 손기정에게 물을 건넨 중년 부인 루이제 네프 등 우승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자료까지 있다. 결승 테이프를 끊는 순간, 일본과 독일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손기정 선생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한국이 식민지가 됐기 때문에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일본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와 보면 식민지라는 게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일본에 항거한 영웅으로 미화되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 평화, 달릴 때 달리고 싶은 자유, 포기하지 않는 정신과 불굴의 투지. 그게 할아버지가 남기고 싶어한 유산”이라고 말했다.

이해준 기자

우리가 잘 몰랐던 손기정

◆손기정은 어렸을 때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했다. “스케이트를 살 돈이 있었다면 스케이트 선수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올림픽 우승 후 일본 경찰은 손기정을 그림자처럼 감시했다. 양정고 급우와의 축하 다과회도 열지 못했다.

◆손기정은 5000m, 1만m 등 장거리는 물론 400m, 800m, 1500m에도 출전했고,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시상대에서 기미가요를 들으며 손기정은 ‘다시는 일본을 위해 달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고, 은퇴했다.

◆손기정은 1937년 메이지대학에 들어갔다. 입학 조건은 ‘다시는 육상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손기정이 지도한 서윤복은 1948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1950년 대회 땐 함기용·손길윤·최윤칠이 1~3위를 휩쓸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현지에서 황영조의 마라톤 우승을 응원했다. 날짜는 8월 9일. 손기정이 베를린에서 우승했던 날이다.



사진 설명

1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골인하고 있다.

2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오른쪽부터 하퍼, 손기정, 남승룡.

3 히틀러에게 받은 우승 기념 묘목은 둘레 3m, 높이 17m로 자라났다. 현재 서울 만리동 손기정체육 공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4 손기정이 베를린에서 한국의 지인에게 보낸 엽서. ‘슬푸다’라는 세 글자가 그의 심정을 말해주고 있다.

5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를 봉송하고 있는 손기정 선생.

[중앙포토, 손기정기념재단, 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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