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지성 폭우
견모 조원선
해 ㅡ 아는 바 전혀 없다. 그런 명령을 내린 기억도 안 난다. 그냥 구름 뒤에 서 있었을 뿐.
난 결백하다.
구름 ㅡ 해가 뒤에서 내 등을 떠밀었다. 난 그저 해의 지시대로 비에게 명했다. 난 결백하다. 상관의 지시대로 전달했을 뿐이다.
천둥 ㅡ 때가 때인지라 한 번 소리를 질러봤다. 정신들 차리라고 고함 좀 친 게 무슨 문제가 되는 가? 듣기 싫으면 귀마개를 해라. 난 죄 없다.
번개 ㅡ 구름들이 지랄발광 싸움질하고 천둥이 소리 고래고래 지르고 아 그거 말리느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정신없었다. 다 구름과 천둥 탓이다.
달 ㅡ 난 그 시간이 낮이라 잤다. 낮의 일은 난 모른다. 관계없다. 내 업무시간은 18:00 부터 06:00 까지다. 사실은 밤이라도 난 헛것이다. 붕 떠서 눈만 껌벅이는 허수아비다. 그저 모든 책임은 해에게 있다.
비 ㅡ 난 직속상관 구름의 명령대로 움직인다. 죽으라면 죽을 각오로 충성한다. 쏟으라고 해서 막 쏟았다. 천둥과 번개도 함께 놀은 건 사실이다. 멈추라는 지시를 못 들었다. 이건 천둥과 번개의 발작적 난리로 유무선통신이 두절된 때문이다.
오라 오지마라 난 어느 장단에 춤추란 말인가? 난 최 말단에서 명대로 충직하게 움직일 뿐이다.
바람 ㅡ 공연히 날 물고 들지 마라. 나야 그저 이리저리 발 닿는 대로 무작정 날아다니는 놈이니 이번 일과는 절대 무관. 그저 구름이 자기 내려달라는 곳에 달랑 내려준 것뿐이니까. 그 뒤는 모른다.
기상청 ㅡ 우리는 사람이다 보니 귀신같이 100점짜리 족집게 정보를 맨날 제공하지는 못 한다. 아 비야 오는 날도 있고 안 오는 날도 있고 많이도 오고 적게도 오고. 뭐 그런 거지. 국지성폭우란 건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자연이 졸지에 아무데나 들입다 쏟아 붓고 튀는 것이니 각자 재수 없는 국지로 뽑히지 않도록 기도나 하시라.
허 허 허 허 허 웃을 수밖에 ㅡ 이거 요새 어느 놈들 노는 거랑 아주 똑같구나.
(1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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