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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멸치의 명복을 빌다

犬毛 - 개털 2007. 10. 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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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멸치의 명복을 빌다

犬毛 趙源善



일요일 오후입니다

별것도 아닌 일 아내에게 왈칵 신경질 부리고는 거실바닥에 신문지를 좍 펼치면서

볼거리 없는 요새 신문 하루치가 9장임을 처음 알았습니다.


딸년 들고 온 멸치 한 상자 들어내어 공연히 똥을 고르기 시작 합니다

똥이 아니라 실은 내장 이지요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여섯 마리 일곱 마리 여덟 마리

아홉 마리 열 마리째 훑어내고 나니까

숫자 세는 게 꽤 재미있어져

일단 이 멸치가 전부 몇 마리인가 그냥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한 마리씩    1   2   3   4   5   6   7   8   9   10

두 마리씩    2   4   6   8  10  12  14  16  18  20

세 마리씩    3   6   9  12  15  18  21  24  27  30

네 마리씩    4   8  12  16  20  24  28  32  36  40

다섯 마리씩  5  10  15  20  25  30  35  40  45  50

여섯 마리씩  6  12  18  24  30  36  42  48  54  60

일곱 마리씩  7  14  21  28  35  42  49  56  63  70

여덟 마리씩  8  16  24  32  40  48  56  64  72  80

아홉 마리씩  9  18  27  36  45  54  63  72  81  90

열 마리씩   10  20  30  40  50  60  70  80  90 100


가로로 세로로 멸치무더기가 척 척 잘도 맞아갑니다

신문지 한 장에 이렇게 늘어놓으니 참으로 멸치들이 아담하고 예쁩니다

오랜만에 멸치들로 만든 구구단을 신나게 외웁니다

이게 엄청나게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도 모를 정도입니다.


두 번째 신문지에도 세 번째 신문지에도

네 번째 신문지에도  다섯 번째 신문지에도

여섯 번째 신문지에도 드디어 무사히 정렬을 마쳤습니다

카펫에 가득합니다. 


내가 그들의 대장입니다

비록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말라비틀어져 비비꾀었어도 큰 머리통 분명히 달린데다

하얀 두개의 빛나는 눈알과

옆줄 회색 비늘의 고운 무늬랑

섬세한 꼬리지느러미의 결까지 아주 선명 합니다

하나같이 씩씩하게 마치 살아 움직일 듯 합니다

휘이익- 휘파람 신호로

신문지 아홉 장 희뿌연 바다 위에 수많은 멸치들이 질서정연하게 헤엄칩니다

위로 아래로 이리로 저리로

내 뒤를 따라 

아 아 아-

진짜로 대단한 장관입니다.


철커덕 아내 현관 문소리가 내 멸치 떼를 순식간에 흩어뜨렸습니다

멸치처럼 꼬부라진 내 허리 통증이 불현듯 살아납니다

거실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내 친구 멸치들은 입이 무거워 아무 말 없습니다

아무튼 멸치들과 신선한 자유(?)를 누리면서 덕분에 내 신경질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삼가 멸치들의 명복을 빕니다

나는 주섬주섬 멸치들의 빳빳한 시신을 관 속에 쏟아 넣습니다.


아내 표정이 어리벙벙합니다

할 수 있으면 다음 일요일에도 또 이 짓을 할 예정입니다

나 절대로

안 미쳤어요.

<0710>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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