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멸치의 명복을 빌다
犬毛 趙源善
일요일 오후입니다
별것도 아닌 일 아내에게 왈칵 신경질 부리고는 거실바닥에 신문지를 좍 펼치면서
볼거리 없는 요새 신문 하루치가 9장임을 처음 알았습니다.
딸년 들고 온 멸치 한 상자 들어내어 공연히 똥을 고르기 시작 합니다
똥이 아니라 실은 내장 이지요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여섯 마리 일곱 마리 여덟 마리
아홉 마리 열 마리째 훑어내고 나니까
숫자 세는 게 꽤 재미있어져
일단 이 멸치가 전부 몇 마리인가 그냥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한 마리씩 1 2 3 4 5 6 7 8 9 10
두 마리씩 2 4 6 8 10 12 14 16 18 20
세 마리씩 3 6 9 12 15 18 21 24 27 30
네 마리씩 4 8 12 16 20 24 28 32 36 40
다섯 마리씩 5 10 15 20 25 30 35 40 45 50
여섯 마리씩 6 12 18 24 30 36 42 48 54 60
일곱 마리씩 7 14 21 28 35 42 49 56 63 70
여덟 마리씩 8 16 24 32 40 48 56 64 72 80
아홉 마리씩 9 18 27 36 45 54 63 72 81 90
열 마리씩 10 20 30 40 50 60 70 80 90 100
가로로 세로로 멸치무더기가 척 척 잘도 맞아갑니다
신문지 한 장에 이렇게 늘어놓으니 참으로 멸치들이 아담하고 예쁩니다
오랜만에 멸치들로 만든 구구단을 신나게 외웁니다
이게 엄청나게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도 모를 정도입니다.
두 번째 신문지에도 세 번째 신문지에도
네 번째 신문지에도 다섯 번째 신문지에도
여섯 번째 신문지에도 드디어 무사히 정렬을 마쳤습니다
카펫에 가득합니다.
내가 그들의 대장입니다
비록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말라비틀어져 비비꾀었어도 큰 머리통 분명히 달린데다
하얀 두개의 빛나는 눈알과
옆줄 회색 비늘의 고운 무늬랑
섬세한 꼬리지느러미의 결까지 아주 선명 합니다
하나같이 씩씩하게 마치 살아 움직일 듯 합니다
휘이익- 휘파람 신호로
신문지 아홉 장 희뿌연 바다 위에 수많은 멸치들이 질서정연하게 헤엄칩니다
위로 아래로 이리로 저리로
내 뒤를 따라
아 아 아-
진짜로 대단한 장관입니다.
철커덕 아내 현관 문소리가 내 멸치 떼를 순식간에 흩어뜨렸습니다
멸치처럼 꼬부라진 내 허리 통증이 불현듯 살아납니다
거실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내 친구 멸치들은 입이 무거워 아무 말 없습니다
아무튼 멸치들과 신선한 자유(?)를 누리면서 덕분에 내 신경질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삼가 멸치들의 명복을 빕니다
나는 주섬주섬 멸치들의 빳빳한 시신을 관 속에 쏟아 넣습니다.
아내 표정이 어리벙벙합니다
할 수 있으면 다음 일요일에도 또 이 짓을 할 예정입니다
나 절대로
안 미쳤어요.
<0710>1집